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차르여, 왜 인민을 저버리십니까"… '피의 일요일' 사건 담아

입력 : 2020.10.06 03:30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905년'

1905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비극적인 해였습니다. 1910년엔 우리 민족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는 '경술국치'가 일어났죠. 그런데 유럽 역사에서도 1905년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은 지금까지 자주 연주되는 유명한 교향곡으로 남아 있어요.

◇러시아 혁명의 씨앗을 뿌린 '피의 일요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옛 소련 시기 활동한 대표적인 교향곡 작곡가입니다. 그가 남긴 15개의 교향곡은 러시아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은 걸로 잘 알려져 있어요. 그중 자신이 태어나기 1년 전 일어난 러시아 노동자들의 폭동,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사건에 주목해 만든 작품이 1957년 초연된 '교향곡 11번'입니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러시아의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차르(러시아 황제)의 거처를 향해 가두 행진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인민을 저버리지 마시옵소서"라고 쓰인 청원서를 가지고 있었고,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라고 쓴 피켓을 들고 평화롭게 행진했죠. 하지만 차르의 군대는 평화 시위 중인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어요.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사건이 바로 '피의 일요일'입니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노동자 학살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노동자 학살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모두 4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11번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시초가 된 이 비극적인 사건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먼저 '궁전 앞 광장'이라는 제목의 1악장은 차르가 머무르던 동궁 앞의 불안한 상황과 민중의 고통스러운 심리를 그려요. 하이라이트인 2악장의 제목은 '1월 9일'(러시아력 기준, 지금의 1월 22일)로, 먹을 것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군중의 호소와 저항의 흐느낌을 묘사하죠. 그리고 마침내 벌어진 총격과 희생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극적인 음향으로 그려냅니다. '영원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3악장은 장송행진곡풍으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내고, '경종'이라 이름 붙인 4악장은 힘찬 행진곡풍의 악상과 이전에 나타났던 주요 모티브들로 앞으로 다가올 본격적인 러시아혁명에 대한 기대와 미래에 닥쳐 올 거대한 폭풍을 예견합니다.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호소력 강한 악상이 인상적인 작품이에요.

◇러시아 혁명을 교향곡에 담다

쇼스타코비치는 활동 당시 공산 독재정권의 방해로 여러 고통을 겪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를 음악을 통해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1번 교향곡' 다음으로 1961년 발표한 '교향곡 12번' 역시 러시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요. 부제는 '1917년'으로, 1917년 발발한 러시아 혁명을 소재로 하고 있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을 다룬 이 작품은 레닌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격한 감정을 큰 스케일의 오케스트라 음향으로 그려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보다 앞서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붙은 '교향곡 7번'도 발표했는데요. 1941년 9월 레닌그라드시를 침공한 나치 독일군에 항거하는 정신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쇼스타코비치는 당시 러시아군에 자원 입대해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소방수로 건물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쇼스타코비치는 시대적 상황을 음악에 적극적으로 담아냈어요.

체코 출신의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1854~1928)도 1905년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한 피아노 소나타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체코의 중동부에 있는 중심 도시 브르노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시위를 벌이던 한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다룬 음악이지요.

두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나타의 첫 번째 악장은 '예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요. 슬프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거칠고 폭력적인 리듬이 교차해 듣는 이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두 번째 악장의 이름은 '죽음'입니다. 청년의 안타까운 희생을 슬퍼하는 비가(悲歌)풍의 악상이 반복되죠. 이 작품에는 '1905년 10월 1일'이라는 부제도 붙어 있는데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날짜입니다.


김주영·피아니스트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