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감옥에서도 만세 부르던 17세 소녀… 100년 전 오늘 숨졌대요

입력 : 2020.09.29 10:18

유관순 열사

2018년 3월 2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1851년 창립 이후 주로 백인 남성들의 부고 기사를 다뤘는데, 이제 주목할 만한 여성을 추가하려고 한다"며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싣기 시작했어요. 이 시리즈의 첫 번째는 '일제에 저항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관순'이었습니다.

오늘(2020년 9월 28일)은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가 감옥에서 숨진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최근에 발간된 전기 '유관순 횃불되어 타오르다'(고혜령 저) 등을 근거로, 만 17세 나이로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제 나라를 찾으려는데 어째서 죽이느냐"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 병천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나 서울로 유학, 이화학당에서 공부했어요. 키가 168㎝로 당시로서는 장신이었고 성격이 외향적이고 적극적이었다고 해요. 정동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면 가진 돈을 다 털어 줬고, 야식을 파는 고학생이 지나가면 만두를 한 보따리 팔아줬다고 합니다. 공부를 무척 잘하면서도 학교의 청소와 빨래 같은 궂은일을 도맡았다고 해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은 기숙사 담을 넘어 만세 시위에 참여했어요. 3월 5일 일제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 속에서 경찰에게 체포된 유관순은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석방돼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죠. 3월 10일 전국적인 휴교령이 내려지고 이화학당 교사들이 만세운동 배후 혐의로 잡혀가자 유관순은 친구들에게 말했지요. "우리가 지금 만세 부르고 나라를 찾으려는데 공부할 게 아니다. 각자 시골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

일제가 작성한 유관순 열사의 신상카드예요. 유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시절 촬영된 사진이라고 합니다. 가혹한 고문 때문에 얼굴이 부어오른 상태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가 작성한 유관순 열사의 신상카드예요. 유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시절 촬영된 사진이라고 합니다. 가혹한 고문 때문에 얼굴이 부어오른 상태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3월 13일 유관순은 경부선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친구들에게 기차 소리가 '대한독립, 대한독립'으로 들린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 등 마을 어른들에게 품고 온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상세히 알렸습니다. 또한 발이 부르트도록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 참여를 설득했습니다. 당시 한밤중이나 새벽에 개가 짖으면 사람들은 '관순이가 오나 보다' 했대요. 몰래 태극기를 그리는 일도 유관순의 몫이었습니다.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어요. 일본 헌병은 비폭력 시위를 총칼로 탄압했습니다.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은 창검에 찔렸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유관순은 총구 앞으로 뛰어들어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무기)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감옥에서 펼친 '제2의 만세운동'

유관순은 공주 감옥으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어요. 법정에서도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 아니냐!"고 당당히 항의했지요.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3년형을 내렸는데,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느냐"며 상고(원심 판결에 불복해 상급 법원에 신청하는 것)하지 않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만세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죽여라. 내 목숨 죽어서 너희 놈들을 쫓아낼 수 있다면 열 번 백 번 죽어도 좋다"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을 기해 유관순은 감옥 안에서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합니다. 이날 오후 2시 유관순은 함께 수감된 어윤희·이신애 등과 함께 큰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이 소리를 듣고 3000여 명의 수감자가 모두 호응했고, 애오개와 서소문까지도 만세 소리가 번져 전차 통행이 마비됐다고 합니다.

지하 독방에 수감돼 악랄한 고문과 구타를 겪은 유관순은 위중한 상태가 됐지만 일제는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방치했습니다.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의 시신은 2주가 지난 10월 12일에야 학교로 돌아왔는데, 온몸이 멍이 들고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고인에게 훈장을 주는 것)됐고, 지난해엔 1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됐습니다.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 '유관순'은 오래도록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많은 학생들이 불렀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