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처음엔 코미디로 연출했다가 혹평 받아… '비극'으로 바꿔서 대성공
입력 : 2020.09.22 03:30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
안톤 체호프(1860~1904)는 러시아 문학에서 절정의 수준을 보여준 단편소설 작가이자 희곡 작가입니다. 프랑스의 모파상, 미국의 오 헨리와 함께 '세계 3대 단편 소설가'로 꼽히죠. 여기에 더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연극 무대를 꼽자면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브레히트와 함께 체호프의 작품이 거론되는데요. 하지만 체호프의 희곡은 그리 많지 않아요. 7편의 장막극과 미완성까지 포함한 10편의 단막극 등 17편이 전부입니다. 총 37편의 장막극을 남긴 셰익스피어, 42편의 희곡을 남긴 브레히트에 비하면 적은 숫자예요.
- ▲ 연극 '갈매기'의 한 장면이에요. /위키피디아
이 작품은 어느 호숫가 별장을 배경으로 등장 인물 10명의 엇갈린 사랑과 인생을 다뤄요. 어느 늙은 남자 소린의 집에 여동생이자 여배우인 아르카지나가 아들 트레플료프와 유명 소설가인 애인 트리고린과 함께 찾아오면서 공연의 막이 오릅니다.
작가를 꿈꾸던 트레플료프는 옆 마을 아가씨 니나를 사랑해요.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하던 니나는 트레플료프를 외면하고 트리고린을 따라갑니다. 훗날 트리고린과 헤어진 니나가 다시 트레플료프를 찾아오지만 트레플료프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해요. 극 중 '갈매기'가 잠깐 나오는데, 결말에 대한 암시이자 꺾여진 꿈과 사랑을 의미하는 상징물입니다.
체호프는 그의 나이 24세 때인 1884년, 6개의 단편을 실은 첫 선집(여러 작품을 모은 책) '멜포메네'를 출간했어요. 당시 그는 필명인 '체혼테'를 사용했고 수많은 단편을 각종 잡지에 기고했죠. 그러던 1886년 체호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원로 작가 그리고로비치가 장문의 편지로 체호프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재능을 소중히 여겨 단숨에 글을 쓰지 말 것이며 필명 뒤에 숨지 말고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라"고 충고한 거죠. 이 편지는 체호프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해요.
체호프는 '갈매기'를 "코미디, 다섯 푼짜리 사랑 이야기"라고 했어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이 작품은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초연 당시 엄청난 혹평을 받으며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코미디로 연출할 것"이라는 체호프의 요구 때문이었는데요. 정작 관객들은 이 연극을 보면서 사랑에 실패하고 삶에 좌절하고 자살에 이르는 주인공의 삶을 비극으로 받아들였으니까 그 격차가 꽤 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체호프는 이렇게 좌충우돌하는 인물들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그런 비극에서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패를 맛보고 좌절하던 체호프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사람은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 콤비였습니다. 현대 연기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사실주의 연기 이론을 확립한 연출가로 유명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체호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어요. "'갈매기'는 나를 매혹시킨 유일한 현대 희곡입니다."
2년 후인 1898년, 이들이 세운 모스크바 예술극장 개관 기념 작품으로 재공연된 '갈매기'는 진지한 비극으로 연출됐고,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뒀답니다. 이후 체호프의 모든 작품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됐고 극장의 정식 이름도 '체호프 기념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