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세계의 박물관] 로댕이 살던 파리의 대저택… '생각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죠

입력 : 2020.08.25 03:09

로댕 미술관

프랑스 파리 시내 거리와 광장, 공원에는 역사적인 위인의 행적을 기리는 동상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1900년 파리박람회를 전후해 프랑스 당국은 파리를 문화예술의 도시로 강조하기 위해 유명 문학가나 예술가, 영웅의 조각상을 시내 곳곳에 제작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장려했죠.

당시 파리에서 탁월한 실력과 노력으로 주목받으며 큰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조각가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입니다. 로댕은 파리를 휩쓸던 공공 조각품 유행 덕택에 높은 명성과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어요. 또 돈이 생길 때마다 많은 미술품을 사들여서 수집가로도 유명해졌죠. 그런 그의 작품과 수집품을 한자리에 모은 곳이 파리의 로댕미술관입니다.
작품1 -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906년, 청동.
작품1 -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906년, 청동. /로댕 미술관
로댕미술관은 18세기 초 지어진 '비롱 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이에요. 로댕이 말년인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살았던 곳인데, 저택 정원이 파리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름다워서 정원에 들어가려면 따로 입장권을 사야 한답니다. 이 정원에는 로댕이 만든 야외 조각품이 많이 세워져 있는데, 우리에게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작품1〉이 대표적입니다. 손을 턱에 괸 채 웅크리고 앉아있는 이 남자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 진지하게 사색하는 인간을 상징해요.

원래 프랑스 정부는 주인 없이 비어 있던 비롱 저택을 팔아서 처분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한때 로댕의 비서로 일했던 독일 시인 릴케가 이 사실을 알고 비롱 저택을 로댕에게 추천했지요. 비롱 저택을 마음에 꼭 들어 한 로댕은 돈을 주고 저택을 매입하는 대신, 자신의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할 테니 저택에 자신의 미술관을 지어달라고 했답니다. 이 제안을 수용한 정부는 로댕에게 죽는 날까지 비롱 저택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로댕의 작품 500여 점과 그가 평생 수집한 미술품 6000여 점을 모두 국가 소장품으로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3년간 내부를 단장해 1919년 로댕미술관의 문을 열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댕은 미술관 개관의 영광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작품2 - 카미유 클로델, ‘로댕의 흉상’, 1888년, 청동(사진 왼쪽). 작품 3 - 오귀스트 로댕, ‘다나이드’, 1889~1890년, 대리석(사진 오른쪽).
작품2 - 카미유 클로델, ‘로댕의 흉상’, 1888년, 청동(사진 왼쪽). 작품 3 - 오귀스트 로댕, ‘다나이드’, 1889~1890년, 대리석(사진 오른쪽). /로댕 미술관
작품2는 그의 제자이자 연인으로 유명한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이 만든 로댕의 얼굴입니다. 신을 닮은 천재 예술가가 아니라 주름이 잔뜩 지고 지친 늙은 남자가 말없이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클로델은 재능이 뛰어난 조각가였고 성공하고자 하는 야심도 컸어요. 하지만 로댕의 조수로 일하다 보니 거장의 그늘에 가려져서 존재감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작품3은 로댕이 클로델을 모델로 해서 만든 '다나이드'예요.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스 왕의 딸인데, 죄를 지은 대가로 지옥에서 평생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실 없는 헛된 일만 반복하며 살게 된 것이죠. 로댕은 클로델이 느끼던 깊은 절망을 다나이드의 절망으로 표현했어요. 릴케는 '다나이드'를 보며 "구부러진 등을 돌아 쏟아지는 머리카락과 돌 속으로 사라진 얼굴, 그리고 한 송이 꽃 같은 손에 이르기까지…. 이 대리석상 주변을 둘러보는 건 놀라운 경험"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작품4 -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 1889년, 청동.
작품4 -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 1889년, 청동. /로댕 미술관

작품4는 로댕이 프랑스 북부 칼레시에서 의뢰받아 만든 위인 동상입니다. 14~15세기 프랑스와 영국 사이 벌어진 '백년전쟁' 당시 칼레시는 영국군에 포위되었어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대표하는 지도자급 인사들이 스스로 처형당하겠다고 나서면 나머지 칼레 시민을 전부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섯 명의 귀족이 '시민 대표'로 자원했지요.

로댕미술관 야외에 있는 조각상 '칼레의 시민'은 이 용감한 자원자들이 처형당하는 날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 속 여섯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공포에 휩싸인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지요. 당당하게 죽음에 맞선 위대한 영웅의 동상을 기대했던 칼레시 당국은 죄수처럼 초라해 보이는 조각상을 보고 황당해했답니다. 그러자 로댕은 이렇게 말했죠. "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 나선 시민들의 희생을 보여주고자 했소." 그는 이 작품을 다른 영웅 조각상처럼 높은 받침대 위에 올리는 대신 바닥에 세웠습니다. 높은 받침대 위에 놓인 인물은 관람자가 거리감을 느끼게 되지만, 내 눈높이에 서있는 인물은 마치 나 자신의 이야기인 양 가깝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칼레의 시민'은 칼레를 비롯해 파리, 코펜하겐, 런던, 필라델피아, 뉴욕 등 전 세계 12도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각품은 원본 틀을 토대로 여러 점 주조할 수 있거든요. 프랑스 정부는 1995년 서울(당시 로댕갤러리)을 마지막으로 '칼레의 시민'을 더 이상 복제하지 못하게 하고 있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