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건반 위엔 왼손뿐인데… 양손으로 연주하는 듯 화려하대요

입력 : 2020.08.15 03:00

왼손 피아니스트

최근 미국 출신 거장 피아니스트 리언 플라이셔가 92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952년 스물네 살 때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미국인 최초로 우승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플라이셔는 젊은 시절 탁월한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어요. 하지만 화려한 경력을 쌓아나가던 30대 중반 갑작스레 찾아온 오른손 마비 증세로 현역 무대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최근 별세한 미국 거장 피아니스트 리언 플라이셔는 젊은 시절 오른손이 마비돼 한동안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최근 별세한 미국 거장 피아니스트 리언 플라이셔는 젊은 시절 오른손이 마비돼 한동안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는 음악가로서 삶이 끝난 건 아니라고 믿었어요. 이후 치열하게 왼손으로 연주하는 연습을 했고 대표적인 왼손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교육자로 활동했답니다. 그리고 꾸준한 치료와 재활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2004년, 앨범 'Two Hands(투 핸즈)'를 발표하며 감동적인 '양손 연주'에 성공, 재기했어요. 그리고 양손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에 섰습니다. 이처럼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을 실현한 플라이셔는 인간 승리의 음악인이었어요. 오늘은 플라이셔처럼 피아노 음악사에 남은 왼손 연주자들과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왼손만으로 거장 반열에 오른 연주자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플라이셔는 왼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어요. 이런 플라이셔를 위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들을 만들어 헌정하기도 했는데요. 플라이셔 스스로도 왼손 피아노 작품이 예상보다 훨씬 방대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해요.

오른손을 다쳐 연주하지 못하게 된 피아니스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오스트리아 출신 왼손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1887~1961)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했다가 그만 오른팔을 잃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비트겐슈타인은 동료 작곡가들에게 왼손만으로 치는 피아노 작품들을 써달라고 부탁했고,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이에 화답해 그를 위한 왼손 작품들을 만들어 주었죠. 작곡가 라벨과 프로코피예프가 각각 만든 피아노협주곡 역시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쓴 곡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으로 오른팔을 잃고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했던 대표적인 '왼손의 비르투오소(거장)'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으로 오른팔을 잃고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했던 대표적인 '왼손의 비르투오소(거장)'였습니다. /게티이미지
라벨이 1930년 발표한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보지 않고 들으면 마치 양손으로 연주하는 듯 화려한 연주가 인상적인 명곡입니다. '프로코피예프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1931년)도 시종일관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왼손의 기교와 그에 어우러진 차가운 서정성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에요. 이 외에도 힌데미트·마르티누 등 당대 유명 작곡가들이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노협주곡들을 작곡했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을 '왼손의 비르투오소(거장)'라고 불러요.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스스로 왼손 전용 작품을 만든 음악가도 있어요. 러시아 출신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1915)은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직접 연주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는데, 무리한 연습으로 한때 오른손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어요. 이후 다행히 부상에서 회복해 양손 피아니스트로 계속 활동했는데, 오른손을 쓰지 못했을 당시 만든 '왼손을 위한 전주곡과 녹턴 작품 9'는 한 손만으로도 풍부한 음향과 깊은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선물한 '왼손 샤콘'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는 왼손의 운동신경이 오른손만큼 뛰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왼손의 기교적 훈련을 위해 일부러 만든 작품도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곡이 폴란드 출신 미국 피아니스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1870~1938)가 만든 쇼팽 연습곡 편곡들입니다.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이자 다성음악(여러 멜로디를 한꺼번에 등장시켜 전개하는 음악) 작곡에 뛰어났던 고도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폴란드 출신 명작곡가인 쇼팽의 연습곡 27곡에 자신만의 악상을 추가하고 조성을 바꿔 더 복잡하고 어려운 연습곡들로 만들어냈어요.

모두 56곡으로 이뤄진 연습곡 가운데 왼손만을 위한 작품이 22곡이나 되는데, 고도프스키가 평소 왼손 기교의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여러 성부를 한꺼번에 연주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왼손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데요. 아직도 뛰어난 기교를 지닌 피아니스트만이 도전할 수 있는 '문제작'으로 남아있답니다.

작곡가가 개인적인 사연을 담아 만든 왼손 작품들도 있습니다. 19세기 '피아노의 신'으로 불렸던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말년에 조국인 헝가리를 그리워하며 애국심을 주제로 한 피아노 작품을 여럿 썼어요. 1881년 작곡한 '헝가리의 신(神)'도 그중 하나랍니다.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이 곡은 헝가리의 국민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페퇴피 샨도르 (1823~1849)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4분 남짓한 짧은 곡이지만 심각한 비장미와 열정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곡이죠.

독일 '낭만파 음악의 거장'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가 편곡한 바흐의 '샤콘'도 왼손을 위한 걸작으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브람스의 편곡은 1877년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왼손 기교를 보완하기 위해 썼다가 때마침 오른손이 아파 연주를 잠시 쉬고 있던 클라라 슈만에게 선물했다고 전해져요. 내면의 깊은 정서와 슬픈 서정미가 풍부하게 느껴지는 곡입니다.

이쯤되면 오른손만 쓰는 피아니스트나 연주곡은 없는지 궁금할텐데요. 하나도 없지는 않겠지만 보통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것 보다 상대적으로 드물어요. 이는 악곡의 기초가 되는 화성이 주로 저음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저음이 건반의 왼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저음을 바탕으로 마치 양손이 연주하는 듯 풍부한 음향을 내는데 왼손이 오른손보다 유리하다는 거예요.

왼손 작품들은 일반적인 피아니스트 음악회에선 쉽게 접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한번 들어보면 작곡가들이 한 손 연주만으로 얼마나 많은 음악적 상상력을 만들어냈는지, 연주자들이 얼마나 위대한 성취를 이뤄냈는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