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나는 누군가의 '인형'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입니다"
인형의 집
그렇다면 초연 이후 140년이 지난 지금 '인형의 집'은 어떻게 무대에 오르고 있을까요? 오늘은 수많은 연출가가 새롭게 무대에 올린 '인형의 집'과 그 속에 나타난 여성 모습에 대해 알아봐요.
◇"나는 당신 인형이 아니다"라는 절규
원작 '인형의 집' 속 노라는 은행가 헬메르의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8년, 아이도 셋 있지요. 헬메르는 노라를 마치 철없는 아이나 새장 속 새처럼 여기고 있었어요. 하지만 노라에겐 남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었지요.
마침내 비밀이 드러난 순간, 갈등이 폭발합니다. 헬메르가 노라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네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날뛴 거지요. 노라는 그들의 결혼이 단 한 번도 진실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깨닫게 돼요. 그러고 말합니다. "나는 친정에선 아버지의 인형이었고, 이 집에선 당신의 인형이었어요.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지요." 헬메르가 "아내와 어머니로서 의무를 저버려도 좋단 말이냐"고 묻자 노라는 답합니다. "이제 그런 건 믿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란 말입니다."
- ▲ 헨리크 입센의‘인형의 집’은 현대 연출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됐습니다. (위 사진) 리 브루어 연출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남성은 모두 기형적으로 작은 체구이고, 여성은 매우 키가 큰 미녀로 나옵니다. (아래 사진) 미국 작가 루커스 네이스의 ‘인형의 집 파트2’에서 15년 전 집을 떠났던 노라는 남편, 딸을 다시 만나 논쟁을 벌입니다. /LG아트센터
'인형의 집'이 이토록 유명한 건 결혼 제도를 부정한 아내이자 아이를 버린 어머니의 캐릭터가 당시 매우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19세기 후반은 여성의 인권 신장에 대한 욕구가 이제 막 꿈틀대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노라의 가출은 가부장적 사회를 지탱해 온 가족이라는 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지요. 당시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의 충격은 대단해서 공연을 막기 위해 갖가지 소동이 벌어질 정도였고, 독일 공연 때는 노라 역을 맡은 여배우가 문을 닫고 집을 나가는 장면을 연기하지 못하겠다며 버틸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입센은 독일 공연에서 노라가 집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결말을 수정하기도 했죠. 우리나라에는 1925년 조선배우학교 공연으로 처음 소개됐어요.
◇총 쏘는 노라, 거대한 노라와 왜소증 남편
과거보다 여성 인권이 높아진 오늘날에도 '인형의 집'은 여전히 매혹적인 희곡입니다. 끊임없는 상상을 촉발하는 열린 결말은 전 세계 작가들의 창작열을 달구는 소재가 되었죠. 실제 현대 연출가들이 만든 '인형의 집'에서 노라의 운명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실험 연극의 중심지인 독일 샤우뷔네 베를린의 예술 감독 토마스 오스터마이어가 연출한 '인형의 집―노라'와 미국을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연극 연출가 리 브루어와 마부마인 극단이 만든 '인형의 집'이 대표적입니다. 세계 최고 연출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두 작품 모두 대담한 해석과 충격적 결말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오스터마이어의 '인형의 집―노라'에서 노라는 최신식 럭셔리 아파트의 안주인입니다. 커다란 수족관이 눈길을 끄는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댄스 파티에서 춤을 추던 노라는 집을 나가겠다는 말을 무시하는 남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요. '쾅' 하는 문소리 대신 '탕' 하는 총소리가 들리죠. 집을 떠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남편에게 총을 쏜 거예요. 이처럼 오스터마이어 연출의 노라는 훨씬 더 격정적이고 폭력적인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1879년 초연 이후 100년 넘게 흘렀는데 노라의 분노는 오히려 훨씬 더 깊어진 것 같아요.
리 브루어의 무대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막이 열리면 왜소증에 걸린 남성과 키가 큰 여성이 등장해요. 노라 부부죠. 리 브루어의 무대에 나오는 남성은 모두 기형적으로 작은 체구이고, 여성은 평균 신장보다도 훨씬 키가 큰 미녀로 나옵니다. 이런 과감한 시각적 대비를 통해 남성의 편협한 정신을 작은 키로 표현하고, 여성의 자유로운 사상을 아름다운 육체로 보여주고 있죠.
비록 체구는 작지만 성격 거친 마초(남성 우월주의자)로 등장하는 남편과 달리, 키 크고 건강한 노라는 남편과 이야기하기 위해 무릎 꿇고 기어서 가기를 마다치 않아요. 입센의 원작에서 노라가 헬메르에게 종달새처럼, 다람쥐처럼 애교를 부리며 필요한 돈을 타냈던 것처럼, 리 브루어의 연극에서 노라는 왜소증 남편보다 더 작게 보이려 노력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죠. 하지만 이 극의 결말에서 노라는 자유를 선언하며 그녀를 옥죄고 있던 코르셋과 가발을 모두 집어던져요. 그러고 발가벗은 몸과 민머리로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지난해 서울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미국 작가 루커스 네이스의 '인형의 집 파트(PART)2'는 노라가 떠나고 15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요. 멋진 모자와 드레스를 입은 노라는 성공한 작가가 됐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딸을 다시 만나면서 갈등을 겪게 돼요. '파트2' 역시 노라가 또 한 번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끝을 맺으니, 연극 팬들에게 노라와 문의 이미지는 영원히 각인될 것 같습니다.
지금 서울 대학로에선 '인형의 집'을 극중극 형식으로 넣은 영국 극작가 새뮤얼 애덤슨의 연극 '와이프'도 선보이고 있어요. 이 연극은 여성뿐 아니라 성 소수자에 대한 시선도 담아내고 있지요. '인형의 집'이 보여준 파격과 충격이 시대를 훌쩍 넘어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