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단단하고 이국적인 中 도자기, 유럽에 '시누아즈리' 유행시켰죠

입력 : 2020.08.05 03:00

중국 청화백자

꽃병으로 쓰이던 중국 도자기
최근 유럽 중부의 외딴 마을 집에서 꽃병으로 쓰이던 중국 도자기〈사진〉가 소더비 경매에서 908만4486달러(약 109억원)에 낙찰됐다고 CNN 등 외신이 보도했어요. 원래는 1954년 소더비 런던 경매장에서 56달러(현재 가치로 1500달러·약 180만원)에 팔렸던 것인데 66년 만에'보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 화제가 됐지요.

이번에 팔린 도자기는 18세기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절 최대 도자기 제작지였던 저장성 용천요에서 만든 물건이라고 해요. 당시 용천요는 도자기를 엄청나게 많이 구워서 유럽, 아프리카까지 수출했는데요. 17세기 유럽인들은 중국 도자기에 매료돼 많은 물건을 수입하고 모방하기도 했어요. 유럽인들은 왜 중국 도자기에 열광했던 것일까요?

유럽인들이 열광한 중국 도자기

17세기 유럽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던 새로운 농작물들이 유입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초콜릿과 커피였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이걸 데워서 먹었기 때문에 뜨거운 음식을 안전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했어요.

그때까지 유럽에서 생산되는 그릇들은 모두 저온에서 만들어져 강도가 약했어요. 표면에 바른 유약도 뜨거운 물에 닿으면 녹아내려 안전하지 못했지요. 또 흙의 투수성(물을 통과시키는 성질)을 완벽히 차단하지 못해 액체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어려웠어요. 이런 유럽 그릇의 단점을 극복한 것이 바로 중국 도자기였습니다.

중국 도자기는 고온에서 구워져서 손가락으로 탁 치면 청아한 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했어요. 또 표면이 깨끗하게 닦였기 때문에 관리하기 편했지요. 특히 순백의 도자기에 푸른색으로 이국적인 중국풍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무역 주도

이후 유럽에선 중국 도자기가 단순한 식기가 아니라 부유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 도자기를 경쟁적으로 수집해 궁전이나 자신의 집을 장식했지요. 고급 중국 도자기를 누가 많이 갖고 있느냐가 최고의 자랑거리였다고 해요. 당시 중국 고급 도자기 가격이 흑인 노예 7명을 사거나 중산층이 사는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중국 도자기를 갖기 원했는지 알 수 있어요. 물론 유럽 수공업자들도 중국처럼 질 좋고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당시 유럽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알맞은 흙(고령토)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중국 도자기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고온에 도자기를 굽는 중국 수공업자들의 작업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고온에 도자기를 굽는 중국 수공업자들의 작업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17세기 유럽에서 생산된 그릇들은 강도가 약하고 액체를 보관하기 어려웠는데, 중국 도자기는 이런 단점을 극복해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중국 도자기가 해외에 전해진 건 9세기부터였지만 본격적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건 청화백자가 대량으로 만들어진 명나라 때부터였다고 해요. 14세기 명나라는 다른 나라와 무역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을 취했지만 도자기 등 중국에서 나는 물건을 원하는 나라가 많아지면서 밀수가 성행하자 16세기 후반 해금 정책을 완화했습니다.

정책이 바뀌자 유럽 상인들은 너도나도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몰려들었어요. 당시 도자기 무역의 선두 주자는 포르투갈이었는데요. 이들이 개척한 대서양 항로를 통해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으로 유입됐지요. 포르투갈 왕의 별궁인 산토스 궁전에 '청화백자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중국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고 사고팔았는지 알 수 있어요.

17세기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신흥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도자기 무역의 주도권은 네덜란드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에서 화물을 싣고 돌아오던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호를 대서양 세인트헬레나섬 부근에서 나포해 암스테르담까지 끌고 왔어요. 배에 실려 있던 청화백자들이 유럽 경매장에 나오자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지요. 160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 상선 카타리나호를 또 한 번 믈라카해협 조호르에서 나포했는데, 여기에 약 16t에 달하는 중국 도자기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풍 예술 '시누아즈리' 유행

중국 도자기의 가치가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들은 1년에 10만 점 넘는 중국 도자기를 네덜란드로 실어 날랐어요. 17세기 말에는 영국 상선까지 도자기 무역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도자기 수집 열풍의 영향을 받아 17~18세기 유럽에선 화려한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미술에 중국풍 예술이 결합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미술 사조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어요.

유럽인들은 티포트(차를 우려내는 주전자), 소금 접시, 플레터(받침그릇) 등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용도의 도자기를 구체적으로 중국에 주문하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18세기가 되면서 여러 귀족·왕실의 지원을 받은 유럽 수공업자들이 중국 도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 높은 도자기 제작에 성공했고 이후 중국 도자기의 인기가 한풀 꺾이게 됐답니다.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했던 징더전]

청화백자 생산지로 오랫동안 이름을 날렸던 곳은 장시성 징더전(景德鎭)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도자기 생산 도시로 유명한데, 징더전 교외의 고령산에서 도자기를 만들 때 쓰이는 자토가 대량으로 출토돼 도자기 생산지로 자리 잡았다고 해요.

유럽에서 중국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징더전에선 오늘날 공장처럼 공정마다 기술자를 따로 두어 맡은 부분만 신속하게 반복적으로 작업하는 분업화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