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몽골에 저항했던 특수 군대… 일본에 '연합 전선'도 제의했죠
삼별초
◇3년 대몽항쟁 벌인 특수부대
삼별초란 고려 때 100년 동안(1170~1270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무신정권' 시절 활약한 특수 군대예요. 무신정권 후반기 권력을 잡은 최씨 정권이 도적을 막기 위해 사병(권세를 지닌 개인이 사적으로 거느리는 병사)을 두고 이를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이라 했는데 모두 합쳐 '삼별초'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나중엔 경찰·전투 임무 등 공적 업무까지 수행하는 군대가 되었고, 13세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자 정규군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어요.
- ▲ /그림=김영석
한때 강화도로 피란을 갔던 고려 조정은 몽골과 강화를 맺고 1270년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환도(옛 수도로 돌아옴)했습니다. 그러면서 삼별초에 해산령을 내렸지요. 하지만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면서 "계속 몽골군과 싸우겠다"고 선언했어요. 배중손 장군이 이끌던 삼별초는 진도 용장성을 거점 삼아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새 정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이를 반란으로 여기고 몽골군과 합세해서 진도를 공격했지요.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이 사망했지만 삼별초는 굴하지 않고 장수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1273년까지 항쟁을 계속했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진압 직전까지 삼별초는 남해안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들에겐 두 가지 중요한 변수가 있었는데, 일본과 류큐(지금의 오키나와)였어요.
◇일본 막부에 연합 전선 제의
"도대체 이 국서는 뭐지? 아무래도 이상한데…."
1271년 9월, 고려 조정이 보냈다는 새 국서(國書)를 받아 든 일본 가마쿠라 막부(쇼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 무사정권) 관료들은 당황했어요. 3년 전 국서에서 몽골에 대해 호의적으로 서술했던 고려 조정이 이번에는 몽골을 '야만적인 적'으로 묘사하고 일본에 병력 수만 명을 요청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일본의 외교 실무자 한 명이 몇몇 의문점을 따로 적어 놓았지요.
이 메모가 1977년 도쿄대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고려첩장불심조조'란 문서입니다. 조사 결과, 이 문서에서 언급된 국서는 개경의 고려 조정이 아니라 진도의 삼별초 세력이 보낸 것으로 밝혀졌어요. 고려와 일본이 연합 전선을 펼쳐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내용이었죠. 만약 일본 측과 연합이 성사됐다면 동아시아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국제 정세에 어둡던 일본은 문서 발송자가 삼별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오키나와로 건너갔을까
"이 기와가 왜 여기서 나오지?"
지난 2007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빌려온 유물들로 특별전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사들이 뜻밖의 발견을 했습니다. 13~14세기 오키나와 수막새(수키와가 이어진 처마 끝을 장식하는 기와) 유물 하나가 있었는데, 당시 제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꼭 닮았던 거예요. 박물관이 소장 중인 고려 기와는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진도 용장성에서 나온 것이었지요.
오키나와 기와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진 것도 있었습니다. '계유년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 계유년은 제주도의 삼별초 세력이 진압된 1273년을 말합니다.
일부 학자는 이를 근거로 "삼별초 세력이 제주도에서 남쪽 오키나와까지 근거지를 옮겼다"고 보고 있어요. 제주도에서 오키나와까지는 당시 배로 빠르면 3일 정도 걸렸다고 해요.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궤멸된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로 이동했고, 훗날 류큐 왕국을 건국하는 기초를 세웠을 거라는 추정도 나왔죠. 물론 아직까지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가설일 뿐이지만, 학계에서는 가능성이 아주 없는 추정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