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독립 영웅 네루의 딸… 인도 첫 여성 총리로 핵무장 주도했죠

입력 : 2020.07.29 03:00

인디라 간디

얼마 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빙하 속에서 1966년 1월 20일 자 인도 신문이 발견돼 화제가 됐어요. 이 신문 1면에는 최초의 인도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Gandhi·1917~1984)의 총리 당선 소식이 실려 있었다고 해요. 외신들은 이 신문이 1966년 1월 24일 인도 뭄바이에서 영국 런던으로 향하다가 빙하 부근에 추락한 보잉사 여객기에 실려있던 것으로 추정했답니다.

인도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Nehru·1889~1964)의 외동딸이자, 1966~1977년과 1980~1984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던 사람이에요. 인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12살에 독립 지원 단체 만들어

1917년 인도 북부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난 인디라 간디는 대대손손 관료들과 학자들을 배출한 브라만 계급(인도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의 최고 계급) 명문가 출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어요. 인디라의 아버지 네루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변호사였죠.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요. 전형적인 식민지 엘리트로 살던 네루는 민족운동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비폭력 투쟁'에 감화됐고, 1919년 인도 북서부 펀자브 지방의 도시 암리차르에서 벌어진 '잘리안왈라 광장 학살 사건' 이후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인도의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가 인도 델리의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이에요.
인도의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가 인도 델리의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이에요. 인도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인 그는 한편으로는 반대파에 대한 탄압으로 독재자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잘리안왈라 광장 학살 사건은 광장에서 비폭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인도인들을 영국 소총 부대가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에요. 이 사건 이후 영국의 식민 통치에 협조했던 수많은 인도 온건파 중산층이 민족주의자로 돌아서게 되었어요. 네루의 아버지인 모틸랄과 네루도 독립운동을 하다 1921년 나란히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뜨거운 피를 받은 인디라는 12세 때 또래 청소년들을 모아 '바나 세나(원숭이 여단)'라는 민족 운동 단체를 만들었어요. 이 단체에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시위대에게 물을 주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등 작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했어요. 이 단체는 6만여 명이나 되는 청년이 참여하는 대규모 단체로 성장했지요.

아버지 이어 '부녀(父女)' 총리 탄생

인디라 네루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유학하던 중 페로제 간디와 결혼하면서 '간디' 성(姓)을 갖게 되었어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마하트마 간디'와는 친척지간이 아닙니다. '간디'는 인도에서 비교적 흔한 성이라고 해요. 1947년 인도가 마침내 영국에서 독립하고 아버지 네루가 초대 총리가 되자 인디라는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어요. 1959년에는 여당인 '인도국민회의'의 당수(黨首)가 되었지요.

아버지 네루는 17년간 총리직에 있으면서 인도 헌법을 제정하고 보통 선거제를 도입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어요. 하지만 경제 부문에서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식 계획 경제와 민간 주도의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인도식 '혼합경제정책'을 시도해 인도의 경제 발전을 더디게 했다는 평가도 받아요.

인도 독립 투쟁의 상징인 네루에 대한 인도인들의 굳건한 지지는 그 딸인 인디라에게도 이어집니다. 인디라는 인도의 2대 총리였던 샤스트리가 사망하자 1966년 총리가 되었어요. 당시 인도는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지역을 두고 국경 분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요. 인디라는 1971년 동파키스탄(오늘날 방글라데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파키스탄과 대립했고, 이 때문에 파키스탄과 전쟁(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벌여야 했답니다. 이 전쟁에서 인도가 승리하면서 방글라데시가 완전히 독립하게 됐지요. 또 인디라는 1974년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키며 강력한 인도를 만들어 갔어요. 하지만 경제 부진과 부정부패 등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면서 그는 결국 1977년 총선거에서 패배해 총리직에서 물러났어요.

1984년 시크교도에게 암살당해

인디라는 1980년 다시 총리에 당선됐지만 1984년 독실한 시크교(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결합한 종교) 신자인 경호원 2명에게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인도 시크교 내 강성 분리주의자들이 펀자브주(州) 독립을 선언하며 암리차르의 황금 사원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인디라가 이들에 대한 강경 진압 명령을 내렸거든요. 군사 작전하듯 펼쳐진 진압 과정에서 시크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 유적지인 황금 사원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그러자 독실한 시크교도이던 경호원들이 인디라에게 반감을 갖고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인디라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 등으로 독재자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며 오늘날 인도의 기초를 마련한 여성 지도자이기도 해요. 그의 큰아들 라지브 간디(1944~1991)도 어머니가 암살당하자 총리에 올랐는데, 총선 패배 후 복귀를 노리던 중 암살당했어요. 인디라의 며느리인 소냐 간디는 현재 제1야당인 인도국민회의당 당수로 있지요. 오늘날 인도 역사는 네루·간디 가문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답니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

독립운동을 펼치며 9번이나 투옥됐던 네루는 딸 인디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1930년부터 3년간 네루는 딸에게 196편에 달하는 세계사 강의 편지를 보내주었는데요. 우리나라의 3·1운동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숭고한 독립운동으로 평가하는 등 당시 서구 제국주의 중심의 역사관에서 탈피한 글들이었지요. 그는 편지에서 "제국주의란 약탈하면서도 친선을 과도하게 내세운다"고 했어요. 이 편지들을 엮은 책이 바로 오늘날까지 세계사 교양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세계사 편력'입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