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왕을 처형하지 않는 것 자체가 혁명을 비난하는 것이다"

입력 : 2020.07.22 03:00

로베스피에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이들의 유해 500여구가 프랑스 파리의 '속죄의 예배당' 벽 뒤쪽에 묻혀 있을 수 있다는 외신 뉴스가 나왔어요. 그간 프랑스 역사학계에서는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들의 유해가 파리 지하묘지에 매장되어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속죄의 예배당'에 프랑스혁명기 유명 정치인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1758~1794·작은 사진)의 유해도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오늘은 프랑스혁명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알아볼게요.

◇프랑스 대혁명에 휩쓸린 청년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혁명 때인 1793년 권력을 잡고 공포정치를 펼치다 1794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어요. '상퀼로트(의식 있는 민중)'라 불리던 평범한 대중의 대변인이었던 그는 원래 가난한 평민이 아니라 부르주아(중산계층)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는 프랑스 북부 아라스 지역에서 일하는 변호사였어요.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집을 나가면서 형제들은 친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지요.

로베스피에르는 성실히 공부해서 파리 명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법학 공부를 마친 뒤 고향인 아라스로 돌아가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힘썼어요.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사형선고문에 서명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에 판사직을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이때까지의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1789년 4월, 서른한 살에 아라스가 속해 있는 아르투아 지역의 '제3신분'(평민층) 대표로 선출되고 그해 7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작았던 로베스피에르는 처음부터 정치에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고 해요. 하지만 재야에서 정치 토론을 하는 자코뱅 클럽(훗날의 '자코뱅파')에 참여하면서 점점 자신의 지지층을 넓혀갔지요. 그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고,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오직 세비(歲費)로만 생활하면서 마차도 일절 타지 않았고, 마을 축제에도 스스럼없이 참여하는 등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했어요. 자코뱅파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고 파리 도처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초상화가 발견될 정도였지요.

◇반대파 무자비하게 숙청한 공포정치

프랑스혁명으로 1791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입법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률이 계속 높아지는 등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여기에 더해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펼쳐졌지요. 그러던 1792년 8월, 굶주림에 지친 민중이 분노에 가득 차 국왕과 왕비가 사는 왕궁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입법의회는 왕족을 감금하고 국왕의 권한을 정지했어요.

1794년 7월 27일, 반(反)로베스피에르파가 프랑스혁명기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면을 그린 그림이에요.
1794년 7월 27일, 반(反)로베스피에르파가 프랑스혁명기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면을 그린 그림이에요. 국민공회군에 의해 체포된 로베스피에르는 다음 날 오후, 그가 공포한 법에 따라 재판도 없이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됐어요. /위키피디아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국민공회'가 구성되었고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왕정이 폐지되면서 '제1공화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국민공회 선거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따르는 무리가 총 749석 중 200석을 차지하는 등 대거 의회에 진출했어요. 로베스피에르는 '왕을 처형하지 않는 것 자체가 혁명을 비난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국왕까지 처형한 국민공회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를 설치해 본격적인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자코뱅당 당수 로베스피에르가 있었지요. 그는 무상 의무교육을 도입해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 하는 등 자신이 생각해온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어요. 빈곤 문제는 생필품과 임금에 대한 최고가격제(정부가 시장가격을 통제하는 정책)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부추겼지요. 그는 특히 자신에게 반대하는 반(反)혁명 인사들을 계속 처형했는데요. 혁명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집단 학살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고, 2000여 명이 한꺼번에 루아르강에 수장되는 일도 벌어졌어요. 이로 인해 폭력은 사실상 합법화되었고 나라 전체가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단두대 이슬로 사라지다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빈민들에게 나눠준다는 내용의 법령도 공포했습니다. 1794년 7월에는 '프레리알 22일 법'을 통과시켜 아무 증거 없이 오직 혐의만으로 반혁명 분자들을 처형할 수 있도록 했지요. 이 법을 이용해 혁명재판소는 불과 50일도 안 되는 기간에 137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요. 1793년 3월부터 '프레리알 22일 법'이 공포되기 전까지 약 1년 4개월간 혁명재판소가 1251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무자비한 수치인지 알 수 있어요. 이처럼 약 1년 동안 1만여 명이 공포정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극에 달하자, 당통이나 데물랭 같은 측근들조차 '혁명이 길을 잃고 있다'며 그를 비판했어요. 하지만 혁명 세력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는 오랜 동지였던 이들마저 단두대로 보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국민공회 의원들과 공안위원회 위원들은 '다음엔 내 목이 날아갈 것'이라며 벌벌 떨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은 이가 그의 공포정치에 지쳐가고 있었지요. 그에 반대하는 세력은 은밀하게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1794년 7월 27일 반(反)로베스피에르파가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을 사로잡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 사건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합니다. 국민공회군에 의해 체포된 로베스피에르는 다음 날 오후, 그가 공포한 법에 따라 재판 없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