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교향곡과 함께 베토벤 대표하는 장르… 6곡은 청력 잃은 뒤 작곡

입력 : 2020.07.18 03:03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7곡

매년 여름이면 강원도의 청량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평창 대관령음악제'가 올해로 17회를 맞았습니다. 오는 22일 첫 공연을 시작하는 이번 음악제는 독일의 거장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Beethoven·1770~1827)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데요. 그래서 이번 축제의 제목도 '그래야만 한다'입니다. 베토벤의 '현악4중주 16번' 악보에 씌어 있는 알쏭달쏭한 문구를 옮긴 것이죠.

현악4중주곡은 바이올리니스트 2명과 비올리스트 1명, 첼리스트 1명이 함께 연주하는 실내악곡입니다. 베토벤은 생전에 16개의 현악4중주곡과 한 악장짜리 '대(大)푸가' 등 총 17곡의 현악4중주곡을 남겼는데요. 그의 현악4중주는 9곡의 교향곡, 32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함께 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장르이지요. 오늘은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17개 현악4중주곡을 남긴 베토벤

베토벤의 현악4중주 16번 F장조 작품 135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인 1826년 만든 곡입니다.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의 마지막 악장에는 '힘들게 내린 결정'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또 주요 주제를 나타내는 음표 밑에는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같은 수수께끼 같은 문구가 붙어 있어요.
베토벤이 자신의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 4중주’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당시 오스트리아 빈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의뢰를 받아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사용했어요. 그가 작곡한 총 17곡의 현악4중주곡에는 창작 초기와 중기, 후기 작품 세계의 특징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요.
베토벤이 자신의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 4중주’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당시 오스트리아 빈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의뢰를 받아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사용했어요. 그가 작곡한 총 17곡의 현악4중주곡에는 창작 초기와 중기, 후기 작품 세계의 특징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어떤 이들은 베토벤이 일상과 관련된 가벼운 농담을 적은 것이라고도 하고, 앞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보인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는 아직 미궁 속이에요. 위대한 작곡가가 최후를 맞기 전 만든 작품이라 그 숨은 뜻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게 되는데요. 마지막까지 무언가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베토벤의 모습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번 대관령음악제가 올해 축제의 제목을 '그래야만 한다'로 정한 것도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무대에서 연주를 멈출 수 없는 음악가들의 숙명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상상력으로 가득 찬 거대한 음악 세계를 표현하고 피아노소나타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본연의 면모를 드러내준다면, 현악4중주곡은 작곡가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자기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베토벤이 전 생애에 걸쳐 꾸준히 발표했기 때문에 작곡가의 창작 초기와 중기, 후기 작품 세계의 특징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이든의 영향을 받았던 청년 베토벤
베토벤의 마지막 완성작인 현악4중주 16번 작품 135의 악보예요. 여기에는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같은 수수께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어요.
베토벤의 마지막 완성작인 현악4중주 16번 작품 135의 악보예요. 여기에는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같은 수수께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네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현악4중주는 활로 연주하는 고음과 저음 간의 리듬과 미세한 뉘앙스 등이 조화롭게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난도가 매우 높은 앙상블입니다. 연주가 어려운 것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을 쓰기도 힘든 분야인데요.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수많은 작곡가가 도전 의식을 불태워 왔습니다.

현악4중주는 고전파 시대(18세기 후반~19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융성했던 음악)에 본격적으로 꽃피웠는데, 이를 대표적인 실내악 장르로 만든 사람은 8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을 쓴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었습니다. 20대 청년 시절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을 배우며 도움을 받았던 베토벤도 창작 초기에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베토벤이 20대 후반이던 시절(1798~1800년) 작곡한 현악4중주 작품 18은 모두 여섯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대선배인 하이든의 영향을 받아 균형 잡힌 음향과 단정하게 정돈된 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네 가지 현악기의 조화로운 하모니, 거기에서 나오는 색다른 음색 등에서 젊은 베토벤의 개성을 엿볼 수 있어요.

원숙한 자기고백 두드러진 후기 베토벤

창작 중기에 들어서자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은 더욱 원숙해진 작곡 기술과 관현악곡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발전합니다. 그중 1806년 완성된 작품 59에 들어 있는 세 곡의 현악4중주는 당시 오스트리아 빈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이름을 따 '라주모프스키 4중주'라고 불러요. 이 세 곡은 18세기까지 여흥을 위한 가벼운 음악으로 분류되던 현악4중주를 진지한 예술 작품으로 끌어올린 명작입니다. 여러 개의 멜로디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다성부 표현이 늘어나고 작품의 규모도 커졌죠. 베토벤은 이 세 곡의 시리즈에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사용하기도 했는데요. 작품을 의뢰한 라주모프스키 백작을 배려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50대에 들어선 1822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26년까지 작곡된 후기 현악4중주곡들은 베토벤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만든 만년의 유산입니다. 젊은 시절 보이던 투쟁적이고 거친 힘과 열정적인 의욕이 옅어진 대신, 차분한 자기 고백이 느껴지는 서정적 악상과 화성, 세련된 느낌의 푸가(여러 멜로디가 섞인 기악곡 형식)가 등장하지요. 악장 구성도 보다 자유로워져서, 기존의 4악장 형태에서 벗어나 7악장으로 구성한 작품까지 만들었어요.

러시아 출신의 음악 애호가 갈리친 후작을 위해 만든 작품 127·130·132를 비롯해, 앞서 언급한 의문의 문구가 붙어 있는 작품 135, 기괴한 주제로 복잡한 다성부 음악을 전개하는 한 악장짜리 '대푸가' 작품 133 등 총 6곡은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뒤 오로지 관념 속에서 음악을 만들었던 악성(樂聖) 베토벤의 마지막을 증언해주는 최고의 걸작입니다.

[부다페스트 현악4중주단]

베토벤의 현악4중주는 높은 명성만큼이나 수많은 음악가가 즐겨 연주한 작품이기도 해요. 20세기 전설적인 현악4중주단 중 하나로 꼽히는 음악단은 ‘부다페스트 현악4중주단’입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의 단원들이 1917년 모여 창립한 4중주단으로, 몇 차례 단원 교체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어요. 1969년 해산할 때까지 베토벤 현악4중주를 풍부하고 치밀하게 연주해 명성을 떨쳤답니다. 현재 활동 중인 음악단으로는 '에머슨 4중주단' '아르테미스 4중주단' '벨체아 4중주단' 등이 베토벤 현악4중주곡을 빼어나게 잘 연주하는 세계 최정상급 4중주단으로 유명해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