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하이든 69세에 '사계' 완성, 루빈스타인은 89세까지 연주했죠

입력 : 2020.07.11 03:00

노년까지 빛난 열정

지난달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다 헨델이 9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 3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해 7세에 국제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은 '천재 소녀'였어요. 이후 80여 년간 연주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전설의 무대를 만들어왔지요. 노년까지 열정을 불사른 그녀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음악 애호가들이 많았답니다. 음악사에는 헨델처럼 인생의 황혼기를 넘어서도 지치지 않는 활동으로 열정을 뽐낸 음악가들이 여러 명 있어요. 많은 사람이 이들의 지치지 않는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77세까지 노익장 과시했던 하이든

클래식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노익장으로 꼽히는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입니다. 18세기 후반 빈 고전파를 대표하며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려온 하이든은 지금으로 치면 90세를 훨씬 넘긴 나이라고 할 수 있는 일흔일곱 살까지 살았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고별'이나 '놀람' 같은 교향곡으로 유명한 거장이지만, 사석에서는 농담을 좋아하는 밝은 성격에다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롭게 생활하며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했기 때문일까요.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으로 빛나는 음악을 만들었던 그는 노후에 '파파 하이든(아빠 같은 하이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왼쪽 사진)은 66세에 '천지창조', 69세에 '사계'를 작곡했죠. 오른쪽 사진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75세 때인 1962년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에요.
'교향곡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왼쪽 사진)은 66세에 '천지창조', 69세에 '사계'를 작곡했죠. 오른쪽 사진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75세 때인 1962년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에요. 백발의 그가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은 음악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위키피디아·위키미디어 커먼스
만년의 하이든은 여러 개의 미사곡을 만들고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는 열정을 과시했어요. 천지장조를 작곡했을 때 하이든의 나이는 66세, 사계를 완성했을 때는 69세였는데, 2개의 오라토리오(대규모 종교음악)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요. 예순 살에 자신보다 서른여덟 살이나 어린 베토벤을 만나 잠시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7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이든은 에너지가 넘쳤다고 합니다. 동시대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던 모차르트가 35세, 베토벤이 57세에 생을 마감한 것과 비교하면 하이든이 얼마나 오래 활동했는지 알 수 있어요.

백발의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20세기 최고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1887~1982)도 95세까지 장수한 음악가입니다. 폭넓은 레퍼토리(연주곡 목록)를 자랑하는 뛰어난 연주력과 함께 타고난 친화력으로 많은 팬을 거느렸어요. 이 같은 낙천적 기질이 연주에서도 흘러나와 듣는 이들을 편안하게 만들었죠.

그는 1956년 69세의 나이에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를 가진 뒤에도 매년 100여 회에 달하는 연주회를 열었어요. 또 전 세계를 순회하는 콘서트를 가지면서 70세가 넘어서 완전히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백발을 휘날리며 손이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건반을 내리찍듯이 연주하는 열정적인 모습은 아주 유명해요. 그는 시력을 잃기 직전인 89세까지 무대에 섰는데요. 말년에 그가 남긴 녹음과 영상에서 삶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져 큰 감동을 줍니다.

90세 넘은 '현역' 연주자들

평균 수명이 길어진 현대에는 90세 넘어서도 은퇴하지 않고 활약 중인 음악가들이 특히 많아요. 이스라엘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이브리 기틀리스(1922~)는 올해 98세이지만, 꾸준히 연주를 이어가며 손자뻘인 젊은 음악인들과의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그는 아홉 살에 공개 연주회를 가질 만큼 천재성을 보였어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성공적인 미국 데뷔를 마친 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전 유럽을 중심으로 협연과 독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활동을 이어오고 있지요. 어느 곡이든 자신만의 영감과 해석을 통해 개성 있게 풀어내는 기틀리스의 스타일은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틀리스는 자유분방한 풍모와 음악관으로 한때 배우로 영화에 출연하는가 하면 영국 팝가수 존 레넌과의 협업을 비롯해 재즈와 아프리카 민속음악에도 도전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혀왔어요. 특히 기틀리스는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마스터 클래스'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20세기 유명 3중주 그룹이었던 '보자르 트리오'의 멤버 메나헴 프레슬러(1923~)가 있습니다. 올해 97세를 맞은 그는 아직도 무대를 누비는 현역입니다. 미국 인디애나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세계적인 국제 콩쿠르의 심사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프레슬러는 2차 세계대전 때 고초를 겪은 뒤 스물두 살에 가까스로 미국에 정착했어요. 1955년에는 '보자르 트리오'를 결성하며 솔로보다는 실내악 연주에 주력했어요. 지난 2008년 해산하기 전까지 보자르 트리오는 50여 년의 세월 동안 CD 60장이 넘는 분량의 음악 레퍼토리를 녹음했습니다.

보자르 트리오에서 프레슬러는 바이올리니스트 5명, 첼리스트 3명이 거쳐가는 동안 유일하게 한 자리를 지킨 멤버였습니다. 트리오가 해산되자 은퇴를 바라볼 나이인 85세에 본격적인 솔로 연주자로 새 출발을 선언해 모두를 놀라게 했어요. 그는 91세 때인 2014년 베를린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을 협연했고, 95세가 된 2018년에는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의 독주곡을 녹음해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냈어요.

이들의 놀라운 열정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선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 음악가로서 연주를 숙명이라 여기는 성실성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2014년 내한 공연 당시 기틀리스는 "연주를 멈추는 것은 내게 호흡을 멈추는 것과 같다. 음표 하나는 내게 호흡 한 번과 같은 것이다"라며 생의 마지막까지 연주하겠다고 했어요. 프레슬러는 아무리 힘든 연주 일정이 이어지더라도 중간에 휴식하는 법 없이 정해진 스케줄대로 수업에 임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하이든과 루빈스타인이 보여준 낙천성과 삶을 즐기는 자세도 중요한 비결 중 하나일 것입니다.


[99세까지 무대 선 호르쇼프스키]

피아니스트 미에치스와프 호르쇼프스키(1892~1993)는 99세까지 연주회를 열어 최고령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어요. 폴란드 출신으로 1901년 9세에 데뷔해 1940년대부터는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다 101세에 세상을 떠났죠. 담담하면서도 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주가 특징으로, 20세기 첼로 거장 파블로 카살스 등과 협연으로 유명해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