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고전이야기] 무인도 불시착한 25명의 소년들… 차츰 드러나는 인간의 야만성

입력 : 2020.07.08 03:00

파리대왕

얼굴을 가리는 색칠이 얼마나 사람의 야만성을 풀어놓아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54년 출간된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은 198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인 윌리엄 골딩(1911~1993)의 작품입니다. 골딩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탐구한 작가라는 평을 받는데, '파리대왕'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에요.

대여섯 살에서 많아야 열두 살까지, 25명의 소년들이 태평양의 한 무인도에 불시착합니다. 애초에 서로를 알지 못했던 소년들은 핵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해가던 중이었죠. 소년들은 섬 한 곳에 하나둘 모여들어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논의해요.

1990년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파리대왕'의 한 장면이에요.
1990년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파리대왕'의 한 장면이에요.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은 살기 위해 원시의 본성을 드러내고, 그중 잭이 잔혹한 면모를 보이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소년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열두 살 랠프를 지도자로 뽑은 일이었어요. 이들은 소라를 불어 회의를 소집하고, 소라를 들고 있는 사람만 발언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곧바로 산 위에 봉화도 올려요. 각자의 역할을 맡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년들을 보면 곧 구조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하지만 랠프가 지도자가 된 것이 불만인 소년도 있었어요. 다혈질에 충동적인 성격을 가진 잭은 사사건건 랠프와 대립각을 세웁니다. 랠프는 바닷가에 오두막을 먼저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잭과 그를 따르는 일행은 사냥이 먼저라고 우겨대죠. 며칠 후 잭 일행이 멧돼지를 잡아 오자 그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갑니다.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어린 소년들에게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이죠. 이 사건으로 랠프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지고, 잭 일행의 폭주는 더 심해져요. 기고만장한 잭은 랠프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역할을 하는 '돼지'라 불리는 소년의 뺨을 때리기도 하죠. 하지만 대부분의 소년은 고기를 제공하는 잭 일행에게 넘어간 상태예요.

사람 사는 세상이면 다 그렇듯, 소년들의 세계에도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낙하산병의 시체를 본 소년들이 섬에 커다란 '짐승'이 있는 것 같다며 랠프 일행을 두려움에 떨게 한 거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랠프가 조직한 수색대는 시체를 보고 혼비백산 도망칠 뿐이었어요. 다급한 랠프는 회의를 소집해 봉화 관리를 철저히 할 것과 몸을 피할 오두막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소라를 가져야만 발언할 수 있다는 규칙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 잭 일행의 방해로 회의는 어수선하게 끝나고 말아요.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잭 일행은 '짐승'의 정체를 밝히려는 소년 사이먼을 죽이는 등 10대 소년들이라 생각하기 힘든 잔혹한 일을 저지릅니다. 바위를 굴려 '돼지'를 죽일 때는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어 보이죠. 잭 일행은 얼굴에 기이한 색칠을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춤을 추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랠프는 선(善), 잭은 악(惡)이라며 '파리대왕'이 인간의 악한 본성을 고발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요. 이 책이 출간된 해가 1954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생각해볼 것이 있어요. 골딩은 인간 지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인 20세기에 인류가 저지른 일이라곤 두 차례의 세계대전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그는 '악한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일갈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 몰라요. '파리대왕' 소년들에게서 오늘날 우리 모습이 겹쳐진다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요?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