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잭슨 폴록·드쿠닝처럼… 강렬한 '추상표현주의' 이끈 여성 화가

입력 : 2020.07.04 03:00

최욱경 전시회

화가 최욱경(1940~1985)의 그림을 보면 대담하게 휙휙 그은 빠른 붓질과 캔버스 위에서 온몸을 움직인 듯한 신체의 힘이 느껴집니다. 스물셋이 되던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최욱경은 미국에서 그린 작품 1000여 점을 남겨둔 채 일단 작품 30점만 가지고 9년 만에 귀국했어요. 1971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최욱경의 작품이 소개되었을 때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강렬한 원색으로 그린 추상 작품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요.

1970년대는 '여성 화가'라면 얌전한 느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시절이었어요. 더욱이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는 차분히 가라앉은 색조의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욱경은 선명한 원색 물감을 써서 마치 감정을 바깥으로 전부 끄집어내기라도 하듯 힘차게 그렸던 거예요. 그의 타오르는 듯한 작품들은 지금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있는 국제갤러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최욱경 전시회'예요. 작가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그린 작품들을 포함해 그림 40점이 공개됩니다.

최욱경은 경제적 형편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 미술적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한 부모님 덕택에 열 살 때부터 최고의 화가들에게 미술을 배울 수 있었어요. 이후 명문 대학교에 진학해 본인 희망대로 유학을 다녀와 교수로 일했으니, 미술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사진1~4
①최욱경, '무제', 1960년대, 종이에 아크릴, 유채, 파스텔. ②잭슨 폴록, '4번(Number 4)',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에나멜, 알루미늄 페인트. ③최욱경, '무제', 1960년대, 종이에 먹. ④작업하고 있는 최욱경 작가. /국제갤러리, '최욱경Wook-kyung Choi'展·카네기미술관
그녀가 유학을 갔을 때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은 '추상표현주의'였고, 다른 새로운 미술 경향들도 조금씩 등장하고 있었어요. 어떤 대상들에서 공통된 성질이나 모양을 뽑아내는 '추상(抽象)'을 통해 진지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개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94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회화 양식입니다. 미국의 작가들, 특히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거나 떨어뜨리는 즉흥적 행위로 표현한 '액션 페인팅'의 선두주자 잭슨 폴록(1912~1956)과 거칠고 대담한 붓질의 윌렘 드 쿠닝(1904~1997)이 유명하지요. 최욱경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미술 잡지를 통해 미국 화가들의 작품을 종종 접할 수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 드 쿠닝의 속도감 있고 대담한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작품1을 보세요. 빠르고 거친 느낌으로 물감을 칠한 작품입니다. 화가가 캔버스 위에서 몸을 움직였던 흔적들이 생생히 살아있는 듯해요. 이 작품에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완성된 그림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과감한 붓질과 움직임의 에너지, 그리고 그림 그리는 과정을 강조한 점은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주된 특징이기도 해요. 잭슨 폴록의 '4번'<작품2>이 대표적이에요. 잭슨 폴록은 물감을 캔버스에 뿌리는 행위로 그림 그릴 때의 행위(액션)를 강조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고, 최욱경의 작품에서도 이런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1960년대의 미국은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에 맞서 각종 저항 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시기예요. 사회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사회 변화를 이끌던 존 F. 케네디 대통령, 비폭력 흑인 인권 운동을 펼치던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혼란스럽던 시기에 그려진 최욱경의 작품 중에는 애도하는 듯한 느낌의 검은 그림들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작품3은 종이에 먹과 잉크를 이용해 그린 것입니다. 수묵화처럼 묽은 먹으로 옅은 회색을 내기도 하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여백을 그대로 형태로 활용하기도 했어요. 그리는 도중에 붓에서 먹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몸을 옮겨간 흔적이 고스란히 화면 위에 남아 있습니다. 모든 붓 자국이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요.

1960~1970년대 우리나라 미술계는 미국보다는 유럽과 일본의 추상 미술에 더 익숙했습니다. 또 한국적인 정서란 마음속 깊은 곳의 감정을 밖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마음을 다스리고 고요하게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었어요. 이 때문에 흰색 그림을 유독 예찬했는데, 흰색은 마음을 비워낸 색일 뿐 아니라 순수한 민족의 상징과도 같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최욱경의 그림이 있는 그대로 평가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실 최욱경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중 어디에서도 편치 않았다고 해요. 1972년, 서른두 살의 최욱경이 한국에 와서 펴낸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읽어보면 '벙어리 아이' '길 잃은 아이' '이름 없는 아이'라고 자신을 부르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이방인으로 지내야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겉돌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화가였지만, 어딜 가도 낯선 얼굴로 살아가야 했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마흔다섯의 나이에 고독한 삶을 마감하고 말았어요. 세월이 흘러 이제 최욱경의 작품은 미국의 유명한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전시되곤 해요.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도 최욱경의 뛰어난 업적과 영향력이 새롭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