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1936년 콜로라도강에 세운 '뉴딜의 상징'… 당대 최대 규모였죠
입력 : 2020.07.01 03:09
후버댐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과 미국 '뉴딜 정책'을 비교하면서 미국 뉴딜의 상징인 '후버댐'을 언급해 화제가 됐어요. 1930년대 대공황으로 무너졌던 미국 경제를 일으킨 상징과도 같은 후버댐을 언급하면서 우리나라도 '데이터 댐'을 활용해 디지털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말했답니다.
실제 미국은 대공황 시기 뉴딜(New Deal) 정책을 펼치면서 후버댐을 건설해 다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어요. 후버댐은 당시 세계 토목 공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됐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공사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후버댐이 미국 경제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뉴딜 정책의 상징처럼 언급되는 것일까요?
◇후버, 타협안을 이끌어내다
후버댐은 미국 남서부의 콜로라도강을 개발하기 위해 1931~1936년 지어졌어요. 하지만 댐을 건설하기로 계획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때보다 훨씬 앞선 1922년이었습니다. 당시 척박한 서부 지역을 개척하면서 마을과 도시 등에 물이나 전기 등을 공급할 방법을 찾다가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오기로 한 거죠. 처음 이름도 지역 이름을 딴 '볼더댐(Boulder Dam)'이었어요.
실제 미국은 대공황 시기 뉴딜(New Deal) 정책을 펼치면서 후버댐을 건설해 다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어요. 후버댐은 당시 세계 토목 공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됐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공사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후버댐이 미국 경제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뉴딜 정책의 상징처럼 언급되는 것일까요?
◇후버, 타협안을 이끌어내다
후버댐은 미국 남서부의 콜로라도강을 개발하기 위해 1931~1936년 지어졌어요. 하지만 댐을 건설하기로 계획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때보다 훨씬 앞선 1922년이었습니다. 당시 척박한 서부 지역을 개척하면서 마을과 도시 등에 물이나 전기 등을 공급할 방법을 찾다가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오기로 한 거죠. 처음 이름도 지역 이름을 딴 '볼더댐(Boulder Dam)'이었어요.
- ▲ 콜로라도강을 막고 세워진 후버댐의 모습이에요. 블랙 협곡을 가로지르는 U자형의 견고한 콘크리트벽으로 이루어진 이 댐은 2만명이 넘는 고용 창출 효과와 라스베이거스 등 인근 도시의 발전을 이끌어내며 미국 뉴딜 정책의 상징이 됐습니다. /위키피디아
그러나 콜로라도강이 걸쳐서 흐르는 콜로라도·유타·애리조나·뉴멕시코 등 인근 주들은 걱정이 많았어요. 댐을 건설하면 당시 급성장하던 캘리포니아주가 강물을 많이 끌어가게 될 것으로 우려한 거예요. 1922년 당시 상무장관이었던 허버트 후버(1874~1964)가 댐 건설을 위해 각 주 간 타협안을 이끌어냈고, 주마다 매년 소비해야 하는 강물의 양을 정해 할당 비율을 지키며 가져가도록 했어요.
◇대공황과 함께 시작한 댐 건설
'후버 타협안'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댐 건설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비용과 안전 문제 때문에 댐 건설은 계속 미뤄졌습니다. 그런데 1929년 3월 허버트 후버가 31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그로부터 몇 달 후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빠집니다. 1929년 10월 24일 주가가 대폭락한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을 시작으로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한 거지요.
후버 대통령은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을 줄이고 공공사업 지출을 늘리겠다고 발표했어요. 이에 따라 건물 60층 높이에 이르는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습니다. 1931년 '식스 컴퍼니'가 4900만달러에 공사를 따냈는데, 이는 그때까지 미국 정부가 승인한 건설 계약 중 최대 규모 액수였다고 해요.
후버댐은 위에서 봤을 때 아치형의 중력 댐(자체의 무게로 저수지의 물을 지탱하는 댐)으로, 블랙 협곡을 가로지르는 U자형의 견고한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높이는 221m로 63빌딩 높이(약 250m)와 비슷한데 당시 최대 규모 토목공사였다고 합니다. 공사엔 시멘트 약 8억L와 철근 2만t이 필요했고, 콘크리트만 660만t이 들어갔어요.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포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해요.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인부들은 댐 건설 예정지인 블랙 협곡에서 다른 곳으로 물줄기를 돌려야 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협곡 벽을 부수는 대규모 폭파가 네 번이나 이루어졌습니다. 인부 수천 명이 그 자리에 콘크리트를 붓기 위해 엄청난 양의 흙과 암석부터 치워야 했어요.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라스베이거스에 내려와 댐 건설에 참여했어요. 공사장 주변 사막엔 노동자들이 머무는 캠프가 차려졌지요. 작업 현장에서 약 10㎞ 떨어져 있는 볼더시티엔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어요. 5년 동안 총 2만1000여 노동자가 댐 건설에 참여했고, 댐은 예정보다 빠르게 완공되었지요.
◇"나는 왔고 보았고 정복당했다"
볼더댐 프로젝트를 이끈 사람은 후버 대통령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는 점 등으로 다음 대선에서 패배합니다. 이 웅장한 건축물의 완공 기념식은 새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 때 열렸어요. 1935년 9월 완공을 앞두고 댐을 방문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왔고, 보았고, 정복당했습니다(I came, I saw, and I was conquered). 인류가 이루어낸 이 위대함에 말입니다."
후버댐은 고용 창출 외에도 다양한 경제적 효과를 만들었어요. 콜로라도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해 서부 지역 관개 사업의 효율성을 높여주었고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 피닉스 등 인근 주요 도시들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후버댐이 내보내는 물은 미국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 농업용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해요. 후버댐의 저수량은 320억㎥에 달하고 최대 출력 135만㎾를 발전(發電)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 최대 다목적 댐인 충주댐의 최대 출력이 40만㎾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인 걸 알 수 있어요.
볼더댐은 1947년 후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후버댐(Hoover Dam)'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85년에는 국가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지요. 오늘날 후버댐엔 관광객이 연간 약 700만명 방문한다고 해요. 후버댐 상류에 조성된 세계 최대 규모 인공 저수지인 '미드 호수'는 연 1000만 방문객이 찾는 인기 휴양지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