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디자인·건축 이야기] 美 건축계 최고상 'AIA 골드 메달', 2017년에야 흑인에게 처음 수여됐대요

입력 : 2020.07.01 03:05

흑인 건축가들

지난달 25일 미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전 세계에서 흑인 차별 규탄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흑인 차별에 대한 분노가 이번 사건을 촉매제 삼아 큰 사회적 움직임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아요.

건축계 역시 그동안 인종차별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근현대 건축을 논할 때 대부분의 성취는 늘 백인 남성들의 작업에 집중돼 있었거든요.

특히 1960년대 초반까지 흑백 차별이 이어졌던 미국에선 더욱 그랬지요. 하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빛나는 걸작을 남긴 흑인 건축가들이 있어요. 미국 동부에서 활동했던 줄리언 아벨레(Abele·1881~1950)와 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폴 윌리엄스(Williams·1894~1980)가 대표적입니다.
가나 출신의 건축가 데이비드 아자예가 설계한 ‘국립미국흑인역사문화박물관’의 모습이에요.
가나 출신의 건축가 데이비드 아자예가 설계한 ‘국립미국흑인역사문화박물관’의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아벨레는 아이비리그인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최초의 흑인 학생이었어요. 1902년 졸업 후 유명 건축사무소에 들어간 그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설계에 참여하고 듀크대 웨스트 캠퍼스의 총괄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등 많은 건물을 지었지요. 1988년 듀크대는 아벨레가 설계한 '앨런 빌딩' 로비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 아벨레의 성취를 기념했는데요. 이는 개교 150년 만에 캠퍼스에 처음 걸린 흑인 초상화였습니다.

윌리엄스도 건축 명문인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공부한 뒤 3000여개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름 높은 건축가입니다. 미국의 '국민가수'인 프랭크 시나트라, 할리우드의 명배우 케리 그랜트의 저택도 그가 설계했고, LA 국제공항의 상징인 '테마 빌딩'도 설계했죠. 미국건축가협회(AIA) 사상 첫 번째 흑인 회원이었던 그는 세상을 떠난 지 37년 만인 지난 2017년 흑인 최초로 'AIA 골드 메달'을 받았어요. AIA 골드 메달은 미국건축가협회가 빛나는 성취를 이룬 최고 건축가에게 매년 바치는 헌정상입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같은 '3대 근대 건축 거장'부터 프랭크 게리, 안도 다다오에 이르는 건축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거지요.

지금은 과거보다 비교적 많은 흑인 스타 건축가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중 대표 주자가 가나 출신의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아자예(Adjaye·54)예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9세부터 영국에서 살게 된 그는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뒤 미국, 유럽, 아프리카를 종횡무진하며 건축 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지난 2016년 워싱턴DC에 문을 연 '국립미국흑인역사문화박물관'은 아자예의 대표작입니다. 나이지리아 요루바족의 전통 목조각 왕관에서 영감을 받은 이 건물은 역피라미드 모양의 장대한 외형이 특징입니다. 19세기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만들던 철물 패턴을 조합한 구릿빛 알루미늄 패널로 건물 외관을 장식해 흑인의 고난과 성취를 상징화했어요. 아자예는 이 작업으로 201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 100'에 흑인 건축가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죠. 영국 왕실도 그에게 훈장과 기사 호칭을 수여해 이젠 '아자예 경(Sir)'으로 불린답니다.

여전히 건축은 백인 남성 중심이에요. 지난해 기준 미국 공인 건축가 11만3000여명 중 흑인은 2300여명(약 2%)에 불과해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13.4%)을 감안하면 너무 적은 수치입니다. 건축의 중요한 역할은 한 집단의 정체성을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일이에요. 흑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기록하는 흑인 건축가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전종현 디자인 건축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