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신들린 바이올린 연주… "악마에 영혼 팔았다" 소문까지 돌았죠

입력 : 2020.06.27 03:00

니콜로 파가니니

흔히 이름난 작품이나 아주 뛰어난 악곡을 '명곡' 또는 '걸작'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감동이 오래도록 지속되어 세대와 민족, 지역을 불문하고 사랑받는 음악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걸작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겠죠.

클래식 음악 중 명곡이라 불릴 수 있는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지만, 후대 음악가들의 새로운 변주와 편곡으로 오랜 세월 생명력을 잃지 않는 곡이 있어요. 바로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니콜로 파가니니(Paganini·1782~1840)의 작품들입니다.

'악마에 영혼을 판 음악가' 파가니니

바이올린 기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파가니니는 너무나 뛰어난 연주 기술을 지닌 탓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음악가'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1831년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홍보하는 포스터 그림이에요.
1831년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홍보하는 포스터 그림이에요. 신들린 바이올린 연주법을 선보였던 그는 당대 유럽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작곡가 겸 연주가였어요.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광의 도가니였는데, 믿기 어려운 연주 실력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해요. /위키피디아
그는 1782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어요. 다섯 살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놀라운 재능을 보이는 신동이었지요. 1810년쯤부터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전 유럽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쳤는데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며 높은 명성을 누렸어요. 곡예를 보는 듯한 그의 신들린 연주에 음악회장은 늘 열광의 도가니였고, 관객 중 일부는 실신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가까운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음을 하나씩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바이올린 현을 손끝으로 튕기는 피치카토, 손가락을 현에 가볍게 대서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등 다채롭고 화려한 기법을 선보였어요. 다만 생전에 제자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연주법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전설처럼 남게 되었지요.

그가 작곡한 '24개의 카프리스―작품번호 1'은 바이올린 기교의 모든 것을 담은 작품인 동시에 지금도 많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도전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연습곡이기도 합니다.

카프리스의 원래 뜻은 '변덕스럽다'는 의미인데요. 짧지만 강렬한 인상과 작품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의 개성에서 파가니니의 음악성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그중 마지막 24번 곡은 난해하면서도 치명적인 마력으로 후대의 음악가들을 매료시켰습니다.

바이올린 독주를 위해 쓰인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을 피아노로 편곡한 인물은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1811~1886)였습니다.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는 리스트는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인 1831년 파가니니의 파리 연주회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 후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뛰어난 기교와 무대에서의 카리스마를 벤치마킹해 유럽 최고의 인기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여섯 곡의 '파가니니 대연습곡집'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명곡들을 토대로 해 자신의 색깔을 덧입힌 멋진 피아노곡들인데요. 그중 마지막 곡인 6번이 카프리스 24번을 편곡한 작품입니다. 다채로운 선율미와 날카로운 음향이 돋보이는 원곡과 비교해 리스트의 편곡은 건반 위의 눈부신 기교와 웅장한 음향이 돋보이지요.

음악가들이 사랑한 '카프리스 24번'

리스트와는 다른 스타일로 변주곡을 만든 또 다른 음악가는 독일의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입니다. 그의 '파가니니 변주곡 작품번호 35'는 카프리스 24번의 주제를 취한 뒤 변주한 것인데, 획기적이고 다양한 기교와 브람스 특유의 우울한 낭만성이 돋보이는 걸작이에요. 브람스의 변주곡은 리스트의 작품보다 훨씬 긴데, 모두 스물여덟 개의 변주가 두 세트에 들어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으로 만들어진 카프리스 24번도 유명합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조국인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탓에 작곡을 많이 하지 못했어요. 그런 그가 1934년 바쁜 시간을 쪼개 완성한 작품이 바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작품 43'입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작품으로, 주제는 역시 카프리스 24번이죠.

모두 24개의 변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짙은 낭만성과 러시아풍의 우수가 강하게 녹아있는 동시에 피아노 독주자의 기교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명곡입니다. 특히 인기가 높은 변주는 18번째 변주인데, 원곡의 모티브를 뒤집은 형태의 멜로디가 매우 달콤한 분위기를 자아내요. 폴란드의 작곡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1913~1994)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파가니니 변주곡'도 거친 리듬과 강렬한 불협화음, 재즈를 연상시키는 즉흥적인 요소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일곱 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피아니스트가 불꽃 튀기는 듯한 연주를 들려주는 곡이라 음악회장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인기곡이 되었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파가니니 편곡

'수퍼 비르투오소(명인)', '건반 위의 수퍼맨'으로 불리는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59)도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토대로 작품들을 남겼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리스트가 편곡한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에 복잡한 불협화음과 잘게 나눈 음표들을 더해 독특한 편곡으로 탄생한 연습곡 3번입니다. 너무나 어려워 한동안 작곡가 본인만이 연주할 수 있다고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젊은 연주자들도 즐겨 다루고 있습니다. 2011년 발표한 아믈랭의 파가니니 변주곡도 카프리스 24번을 주제로 14개의 변주가 이어지는데 베토벤, 쇼팽, 라흐마니노프를 패러디하는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오는 9월에는 그의 내한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처럼 파가니니의 멜로디가 지닌 생명력은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해 무한증식되면서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어요. 다양한 영감의 근원이 음표 속 어디에 숨어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리스트가 편곡한 '라 캄파넬라']

카프리스 24번만큼 유명한 파가니니의 명곡은 바로 '라 캄파넬라'(작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3악장으로, 바이올린이 홀로 연주하는 높은음의 맑은 음향이 종소리를 연상시킨다는 데서 온 별칭입니다. 이 곡도 리스트의 편곡을 통해 더 유명해졌는데요. 앞서 설명한 '파가니니 대연습곡집' 여섯 곡 중 3번째 곡이 '라 캄파넬라'예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연주하고 싶어 하는 이 곡은 어렵고 아슬아슬한 도약음과 번개처럼 빨리 연주해야 하는 음표들, 트릴(옆에 이웃한 음 두 개를 번갈아 빠르게 연주하는 기법)과 옥타브 등 기교적으로 어려운 숙제들이 가득해 피아니스트의 도전 의식을 자극합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