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얼쑤! 절로 터지는 추임새… 랩·댄스 더해진 '퓨전'도 등장
판소리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長林·길게 뻗쳐 있는 숲) 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빠른 비트의 드럼과 묵직한 베이스 기타에 젊은 소리꾼들의 랩이 쏟아지더니, 여기에 선글라스를 쓴 댄스팀이 가세해 춤을 춥니다. 무대 위 에너지가 폭발할 듯해요. 판소리 수궁가의 눈대목(가장 흥미롭고 핵심이 되는 대목)이라는 '범 내려온다'입니다.
수궁가는 자라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속여 용궁으로 데려오지만 토끼가 기지를 발휘해 육지로 도망간다는 내용의 판소리 작품이죠. 어느새 공연장이 마치 댄스 그룹의 콘서트장처럼 들썩이네요. 최근 서울 LG아트센터 무대에서 펼쳐진 7인조 밴드 이날치의 수궁가 공연은 17세기에 시작된 우리 고유의 음악인 판소리를 새롭게 해석한 무대였습니다.
◇1754년 가장 오래된 판소리 기록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북 치는 사람)가 노래와 이야기, 그리고 몸짓으로 풀어내는 공연 형식입니다. 한 소리꾼이 여러 인물을 혼자 연기하며 공연하는 1인극 형식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이야기의 배역을 나누어 두 사람 이상이 연기와 노래를 선보일 때도 있어요. 이를 입체창이라고 합니다.
그럼 판소리 감상을 위해 몇 가지 용어를 알아볼까요? 소리꾼이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창'이라 하고,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듯 어떤 장면과 상황을 설명하는 말은 '아니리'라고 해요. 특히 판소리의 재미는 이야기를 실감 나게 전하는 소리꾼의 표정과 몸짓에 있는데 이를 '발림' 또는 '너름새'라고 하죠. 창과 아니리, 발림을 구사하며 판소리 공연을 이끄는 뛰어난 소리꾼은 명창(名唱)이라고 해요. 아주 다양하고 독특한 음색을 터득해야 하고 복잡한 내용도 모두 암기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혹독한 수련을 거쳐야 한대요.
- ▲ 전통 판소리(왼쪽 사진)는 소리꾼이 고수의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돼요. 이에 반해 ‘이날치 밴드’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선보인 퓨전 판소리는 빠른 비트의 드럼과 베이스 기타에 맞춰 춤을 추며 콘서트 같은 공연을 선보입니다(오른쪽 사진). /국립국장·LG아트센터 제공
판소리라는 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라는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가 합쳐져서 생겼어요. 희로애락을 해학과 음악으로 표현하는 판소리는 소리꾼과 청중의 적극적인 참여, 교감이 공연을 완성하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소리꾼의 창과 아니리에 "얼쑤!" 하는 청중의 추임새가 절로 터지는 순간, 판소리가 제맛을 낸다고 하죠.
판소리의 기원은 17세기 한국 서남 지방의 굿판에서 무당이 읊조리는 노래를 표현한 데서 유래를 찾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판소리라는 명칭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판소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영조 때 문장가인 유진한이 지은 '만화집'(1754년)에 나오는'춘향가'입니다. 서남 지방을 여행하며 직접 들은 춘향가를 한시로 옮긴 것으로, 현재 전해져오는 춘향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해요. 이 책에는 타령(打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판소리는 본사가(本事歌), 잡가(雜歌), 창가(唱歌) 등 다양하게 불려왔어요.
지금의 판소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940년입니다. 판소리 연구가 정노식(1891~ 1965)이 그 해 1월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창극사'에서 처음 썼어요. 구전되어 오기만 하던 판소리의 역사를 처음으로 기록하고 정리한 이 책에서 판소리란 단어가 등장해요.
◇퓨전 판소리의 탄생
판소리의 이야기 속 배경과 등장인물, 상황 등은 보통 조선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처음 판소리가 불릴 때만 해도 그 종류가 열두 가지나 되어서 '열두 마당'으로 불렸죠. 하지만 이 가운데 충, 효, 의리, 정절 등 조선 시대의 가치관을 담은 작품들만 살아남아 지금은 보통 판소리 '다섯 마당'이 주로 공연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로 구성돼 있어요. 판소리는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습니다.
급속한 산업화와 다양한 현대음악의 범람 속에 한때 판소리는 관객들에게 외면당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어요. 하지만 최근엔 다양한 현대적 해석이 더해진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 젊은 관객층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여덟 명창 중 한 명이었던 이날치(1820~1892)의 이름을 딴 이날치 밴드가 대표적이에요. 이들이 부르는 수궁가는 베이스 기타, 드럼 등 현대 악기의 연주에다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모던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댄스와 어우러져 유튜브 조회 수 170만뷰를 넘길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판소리 현대화한 소리꾼 이자람]
판소리의 현대화를 말할 때 소리꾼 이자람(41)을 빼놓을 수 없죠. 춘향가·적벽가의 이수자이자 1999년 최연소 춘향가 8시간 완창으로 전통 판소리를 계승해온 이자람은 2008년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사천의 선인'을 각색한 창작 판소리 '사천가'를 무대에 선보여 주목을 받았어요. 이후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재해석한 '억척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각색한 판소리로 '이자람표 창작 판소리'란 이름을 굳히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