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스포츠로 세상 읽기] 갑자기 제구력 잃은 투수·퍼팅 못하는 골퍼… 극도의 중압감과 관련 있죠

입력 : 2020.06.23 03:00

입스(Yips)

얼마 전 방영됐던 한 인기 스포츠 드라마에는 야구 유망주였던 한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기이한 증상을 겪으며 어려움에 빠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드라마의 극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운동선수들에게 종종 일어납니다.

2000년 미국 메이저리그 투수였던 릭 앤키엘(Ankiel)은 어느 날 갑자기 공을 던지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가 던진 공은 야구를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일반인이 시구하는 것만큼 형편없었지요. 한 경기에서 이런 공을 한 개가 아니고 5개나 던지면서 그는 결국 교체당하고 말았어요. 이전까지 릭 앤키엘은 메이저리그에서 시속 155㎞대 강속구를 던지던 천재 신인 투수였습니다. 결국 릭 앤키엘은 이 경기 이후 영영 제구력을 찾지 못하고 투수를 그만두게 됐습니다.

'천재 신인'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 던지는 능력을 상실하는 '입스'로 투수를 그만두게 된 미국 메이저리거 릭 앤키엘의 모습이에요.
'천재 신인'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 던지는 능력을 상실하는 '입스'로 투수를 그만두게 된 미국 메이저리거 릭 앤키엘의 모습이에요. 그는 이후 외야수로 전향해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에 섰답니다. /위키피디아
릭 앤키엘이 겪은 이런 이상한 증상을 흔히 '입스(Yips)', 또는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1971년 피츠버그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투수 스티브 블래스가 1973년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해 결국 팀에서 방출당한 데서 따온 이름으로, 입스는 의학적으론 '국소성 근긴장이상(focal dystonia)'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 몸의 일부가 갑자기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죠.

우리나라 프로야구에도 입스로 고생한 선수가 의외로 많아요. 키움 히어로즈의 이정후 선수가 내야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이유도 입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정후 선수는 그래도 외야수 전향에 성공했으니 운이 좋은 편이에요. LG 트윈스 소속이었던 김정준 선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입스 증상 때문에 5경기밖에 못 뛰고 은퇴해야만 했어요.

입스는 야구 선수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이 아닙니다. 골프 선수는 퍼팅 능력을 잃고, 농구 선수가 자유투를 넣지 못하고, 축구 선수는 페널티킥을 제대로 찰 수 없게 되는 일이 느닷없이 생겨요. 프로 선수들에겐 모두 선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죠.

선수들이 갑자기 입스에 걸리는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장기간 심한 훈련, 과도한 긴장, 지나친 집중, 오랜 경쟁 활동, 의욕 상실, 성격 요인 등이 입스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승부욕이 강하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선수일수록 트라우마가 될 만한 실패와 충격을 경험하면 입스가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해요. 단순히 긴장을 많이 해서 제대로 기량을 못 내는 정도가 아닌 것이죠. 오랜 시간 극심한 경쟁에 정신과 육체가 시달린 결과 우리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특정 기능을 잃은 거예요.

그러니 입스로 고통받는 선수들을 '정신력이 약한 선수'로 몰아붙이는 것은 이 증상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오히려 의욕이 남들보다 충만하고 집중력이 강하고 강인한 선수들에게 입스가 생길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참고로 릭 앤키엘은 투수를 그만둔 후 눈물겨운 노력으로 외야수로 전향해 많은 팬에게 감동을 주었답니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