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김일성, 스탈린과 회담서 "3일내 전쟁 끝날 것" 장담했대요

입력 : 2020.06.23 03:00

6·25전쟁의 발발

오는 목요일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南侵)'으로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남침'이란 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했다는 뜻이에요. 3년 넘게 계속된 전쟁으로 500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죠. 그런데 광복을 맞고 분단이 된 지 5년 만에 어떻게 이런 비극이 일어났던 걸까요? 오늘은 6·25전쟁을 둘러싸고 급박하게 돌아갔던 한반도 상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

"국제 정세가 변화를 맞았소. 중국 혁명전쟁이 (공산군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중국은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됐소. 또 우리 소련도 지난해 핵개발에 성공했소."(스탈린)

"전쟁은 3일 안에 끝날 것입니다. 미국은 개입할 여유조차 없을 것이고요."(김일성)

[뉴스 속의 한국사] 김일성, 스탈린과 회담서
/그림=김영석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1879~1953)과 북한 지도자 김일성(1912~1994) 간 회담이 있었어요. 스탈린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고 공산 정부를 수립하는 등 국제 정세가 변화하자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 세력이 힘을 뻗치는 데 유리해졌다고 판단했어요. 그는 냉전 대결(직접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국제적 대립)에서 미국에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해 '북한의 남한 침공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김일성도 그다음 달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에게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 북한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중국이 나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1950년 5월 중순 이후 북한은 남침 준비를 급속히 진행했습니다. 소련이 보낸 무기와 장비가 북한에 속속 도착했지요. 6월 15일에는 남침 준비가 모두 끝났어요. 북한은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공격을 시작해 전면전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었지요.

그러나 6월 21일, 김일성은 대한민국 국군이 옹진 방면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결국 작전을 수정해 25일 모든 전선에서 전면전을 개시하기로 했지요. 스탈린이 이 계획에 동의하면서 나흘 뒤 6·25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김일성 "남침하면 쉽게 적화" 주장

6·25전쟁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그동안 남한의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북침설'과, 남한이 북한의 침략을 유도했다는 '남침 유도설' 등이 힘을 얻은 적도 있었어요. 한때 유행했던 좌파 '수정주의 사관' 등의 영향이었지요.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러시아와 공산권 국가들의 기밀 자료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6·25는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 약속을 받아낸 뒤 일으킨 전쟁'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답니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는 6·25전쟁이 발발한 원인에 대해 ①김일성의 권력욕 ②김일성과 남조선노동당 지도자인 박헌영의 권력 경쟁 ③소련 스탈린의 국제 정치적 전략 등 세 가지를 들어요. 먼저 1945년 스탈린에게서 북한 지도자로 선택된 김일성이 한반도를 무력으로 적화통일해 자신의 권력을 튼튼히 하려고 한 것이 원인이었다는 거예요. 또 전쟁을 이용해서 권력을 거머쥐려던 김일성과 박헌영(1900~1956?)의 라이벌 관계도 원인 중 하나였어요. 두 사람 모두 공산권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일단 남침하면 남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쉽게 적화될 것'이라며 실현 가능성 없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김일성 '휴전' 요청 거부한 스탈린

하지만 1949년까지 스탈린은 계속되는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에 '시기상조'라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인 1950년 1월 30일, 마침내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대해 지원 의사를 밝혔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의 냉전 대결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고자 한 스탈린의 외교 전략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후 스탈린은 언제나 북한 편에 선 것이 아니었고, 오직 소련에 유리할 때만 그렇게 했습니다. 1952년 8월 김일성이 중국을 통해 "전쟁 피해가 너무 크니 빨리 휴전을 체결하게 도와달라"고 호소했는데도 스탈린은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두기 위해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거절했어요. 그의 관심은 한반도의 인명 피해가 아니라 미국과 대결하는 데만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휴전은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고 4개월 뒤인 7월 27일에야 이뤄지게 됐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