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용접기서 뿜어내는 거센 불길… 쇠붙이에 영혼 깃들게 했죠

입력 : 2020.06.20 03:00

상념의 공간:조각가의 스케치북展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년 되는 해입니다. 전쟁은 평화롭고 행복하던 사람들의 일상을 앗아가 버리고, 소중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지요. 그래서 전쟁을 목격하며 고통 속에서 버티는 생명의 의지를 작품으로 표현해낸 예술가들이 많아요. 우리나라 1세대 현대 조각가인 송영수(1930~1970)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송영수는 우리나라 최초로 금속의 표면을 불로 녹이는 용접(welding) 방식으로 추상 조각 작품을 만들고 이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킨 혁신적인 조각가예요. 그전까지 조각에서는 일반적으로 주물(casting) 방식을 써왔거든요. 주물은 찰흙으로 모양을 먼저 만들고 그 위에 석고로 틀을 뜬 후 녹인 동(銅)을 틀 안에 부어 모양을 만드는 기법이에요. 이에 비해 용접은 작가가 금속 재료를 직접 녹이고 붙여서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송영수는 서울 성북동에 살며 작업을 했는데, 그런 이유로 가족들은 작고 50주년 회고전을 그가 살았던 동네에 있는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기로 했어요. 그의 대표 조각품 17점과 드로잉 150여 점을 공개하는 '상념의 공간: 조각가의 스케치'전입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29일까지 임시 휴관 중이지만, 오는 8월 9일까지 전시가 진행될 예정이니 조만간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돼요.

예술가 송영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불꽃 같은'일 거예요. 첫째 이유는 우리나라가 전쟁의 화염을 치른 후 거친 잿더미 속에서 불끈 일어서던 시절에 그가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시절 6·25 전쟁을 겪은 그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았어요.

작품1~5
성북동 집에서 작업하고 있는 송영수 작가.(왼쪽 맨 아래 사진) ①송영수 '새' 1969년, 동, 146 x 95 x 75㎝. ②송영수 '형상' 1957년, 철, 112 x 20 x 20㎝. ③송영수 '곡예' 1966년, 동, 78 x 42 x 22㎝. ④송영수 '드로잉' 연도 미상, 종이에 색연필. ⑤송영수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모형. /성북구립미술관 '상념의 공간: 조각가의 스케치북'展
작품1을 보세요. 목이 꺾이고 상처 입은 새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늘을 훨훨 날아 머나먼 세상을 누비고 싶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해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두 날개에 타고났지만 안타깝게도 참담한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하지요. 예술적 자유를 갈망하는 조각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꽃 같은'이라는 단어가 송영수에게 어울리는 둘째 이유는 용접기에서 휙휙 뿜어져 나오는 거센 불길에서 작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철로 용접한 작품2처럼 그의 조각품에는 새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뜨거운 용접 불꽃 속에서 태어나기에 혹시 불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러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불새는 불멸과 환생의 새라고 알려져 있어요. 생명을 다할 무렵 몸에서 뜨거운 빛을 내며 향기 나는 나뭇가지로 둥지를 틀고 스스로 몸을 태워 죽는다고 합니다. 이때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 생명이 탄생한다고 해요.

작품3은 곡예 하는 사람 둘이 손과 발을 맞대고 서로 지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서로 균형을 잡고 있는 순간이에요. 작품4는 이 조각을 구상할 때 그린 스케치이지요. 아마도 엄마가 무릎 위에 아이를 세워 놓고 놀아주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조각을 만들게 되었나 봅니다.

송영수는 평소 늘 스케치북과 연필을 끼고 다녔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둔 스케치북을 열어 방금 떠오른 이미지를 그려두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간혹 벌떡 일어나 습작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운명하던 날 새벽에도 아내에게 "이것 좀 보아, 새벽에 아주 좋은 작품이 떠올라서 이렇게 그렸어"하고 스케치북을 보여주었다고 해요. 평소와 달리 아내는 이른 새벽이니 좀 더 주무시라며 그림을 덮어 두었어요. 저녁에 송영수는 커다란 공공 조형물 계약을 따내었고, 집에 "일이 잘되어 저녁식사 중이야"라며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어요. 과로에 고혈압으로 뇌졸중 증상 등을 보이며 갑작스레 쓰러지고 만 것이지요. 아내는 그날 새벽 스케치를 함께 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100권이 넘는 고인의 스케치북을 소중하게 간직했다고 합니다.

스케치북의 그림들은 송영수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고민한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작품 세계를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필과 펜, 물감과 먹 등으로 그려진 드로잉들은 단지 조각품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라, 회화 작품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갖고 있는 것도 많아요.

작품5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는 탑의 모형으로 송영수가 마지막까지 작업한 것입니다. 완성된 설계도와 모형 그대로 송영수 사후에 제자들이 실제 조형물을 건립해 마무리했다고 해요. 탑 아랫부분을 클로버 형태로 꾸민 높이 30m의 이 조형물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기단(땅 위에 쌓은 단)과 탑신(탑의 몸체)을 합쳐 총 77단으로 쌓아 올렸는데 이는 준공일(1970년 7월 7일)과 고속도로 건설 중 희생된 근로자 77명을 동시에 상징한다고 해요. 지금 이 조형물은 추풍령휴게소에 세워져 있는데, 휴게소 광장에서 기념탑으로 오르는 계단 역시 77계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술계 사람들은 그가 오래 살았더라면 훌륭한 작품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직도 아쉬워해요. 그의 묘비에는 문화평론가 이어령 선생이 이렇게 써주었답니다.

"피 없는 돌에 생명을 주고/거친 쇠붙이에 아름다운 영혼을 깃들이게 한 사람/마흔한 살의 자기 나이보다/더 많은 날들을 살며 그는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