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식탁 위 경제사] 16세기 신대륙서 대규모 재배… 흑인 노예 혹사 당했죠

입력 : 2020.06.19 03:09

사탕수수

최근 영국 서부 항구도시인 브리스틀에 모인 시위대가 17세기 대표적인 노예 상인 에드워드 콜스턴(1636~1721)의 동상을 바다에 빠뜨렸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당시 브리스틀 도심에는 미국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1만여 명이나 모였다고 해요. 이들은 "콜스턴은 이제 우리 도시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외쳤다고 해요. 미국에서 벌어진 흑인 남성 사망 사건에 영국 시위대까지 옛 조상의 동상을 빠뜨리며 항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미국 흑인들이 본래 고향인 아프리카를 등지고 아메리카 대륙까지 오게 된 직접적 계기가 영국의 노예 무역이었기 때문이에요. 노예 무역을 가능케 했던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설탕'이었지요.

설탕 1.5㎏ = 송아지 1마리 가격

설탕은 열대성 작물인 사탕수수 줄기를 잘라 즙을 짜고 그 즙을 오랫동안 끓여 만든 결정체입니다. 설탕 추출 방식은 4세기 인도에서 처음 개발했다고 해요. 유럽에 설탕이 전달된 건 11세기 십자군전쟁 때쯤으로 추정됩니다. 그 전까지 유럽 사람들은 꿀과 조청(곡식으로 만든 감미료)으로 단맛을 냈어요.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왕과 귀족들이 설탕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설탕은 포도당과 과당으로 이루어진 천연 감미료입니다. 설탕 100g당 칼로리는 387㎉로 꿀(294㎉), 물엿(273㎉), 조청(193㎉)보다 높습니다. 이처럼 높은 칼로리 덕분에 굶주림이 일상이던 유럽 중세시대에 설탕은 주로 약으로 사용됐어요. 그런데 일부 부유층이 설탕을 이용한 달콤한 과자를 즐기면서 수요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 당시 설탕 한 줌은 귀한 향신료인 후추처럼 비싸고 귀한 음식이었지요. 당시 영국에서 설탕 1.5㎏이면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해요.

사탕수수밭의 흑인 노예들

설탕의 가치에 처음 주목한 나라는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16세기 자신들이 발견한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설탕을 생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천연두나 홍역 같은 유럽발 전염병 등으로 이미 95% 가까이 사망한 상태였지요. 설탕은 사탕수수 즙을 계속 끓여 증발시켜 결정을 얻기 때문에 열대의 폭염을 이겨내는 강도 높은 노동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스페인 상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끌고 오기 시작했지요.
1823년 서인도제도 안티과 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사탕수수를 자르고 있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이에요.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와 아메리카 대륙에 팔고 이들을 혹사시켜 설탕을 얻는 삼각 무역으로 호황을 누렸어요.
1823년 서인도제도 안티과 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사탕수수를 자르고 있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이에요.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와 아메리카 대륙에 팔고 이들을 혹사시켜 설탕을 얻는 삼각 무역으로 호황을 누렸어요. /위키피디아
그들은 흑인 노예를 마치 짐승처럼 부리면서 설탕을 생산했습니다. 서유럽 나라들이 바닷길을 통해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던 '대항해 시대' 초기 설탕은 아주 비싼 감미료였기 때문에 한 줌이라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이득이었지요. 노예를 구타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잠을 재우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신체 일부를 훼손하고 급기야 본보기로 삼겠다며 죽이기도 했어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노예 제도는 있었지만, 이 시대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처럼 국가가 나서서 400여년 넘게 1200만명이 넘는 특정 지역 사람을 노예로 삼고 부리던 일은 인류사에서 드문 일이었습니다.

설탕으로 호황 누린 영국

이런 방식의 흑인 노예 무역은 스페인을 넘어 유럽 모든 국가에 확산했습니다. 특히 1588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후 대서양 노예 무역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갔지요. 영국은 노예 무역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삼각 무역'으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했습니다. 영국에서 총과 화약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사온 뒤, 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에 팔아넘긴 후 아메리카의 설탕과 목화 등을 가져와 유럽에 파는 방식이었어요.

17세기 중반 설립된 왕립아프리카회사(Royal African Company of England)는 당시 대표적인 흑인 노예 수송 회사 중 하나였는데요. 이 회사는 카리브해 영국령 식민지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영국 국왕 찰스 2세로부터 흑인 노예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받았습니다.

노예 약 21만명이 이 회사의 수송선을 타고 영국 식민지 내 사탕수수·담배 농장 등으로 팔려갔지요. 앞서 언급된 노예 상인 에드워드 콜스턴이 바로 이 왕립아프리카회사의 부총재를 지내면서 막대한 부를 쌓은 인물이에요. 18세기 영국은 전 세계 흑인 노예 수송의 50%를 도맡을 정도였습니다.

브리스틀과 리버풀 등 영국 해안 도시들은 노예 무역과 설탕·목화 교역으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사실상 인건비가 거의 들지 않는 노예를 활용한 식민지 농업으로 수익은 그대로 축적됐지요. 이러한 방식의 자본 축적은 미국에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설탕의 전성시대는 더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설탕을 대량 생산하면서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수익성이 하락한 거지요. 그러자 영국 상인들은 목화, 담배, 커피, 고무 등 다른 대체 상품으로 눈길을 돌렸고, 특히 목화로 만든 면직물에 주목했어요. 면직물은 영국의 특산품인 모직과 달리 가볍고 가공하기 쉬워서 세계 각국에서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거든요. 1769년 영국의 사업가 아크라이트가 수력 방적기를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값싼 면직물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 혁명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발달하자 영국과 미국은 각각 1833년과 1865년, 흑인 노예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어요. 그러나 아직도 미국과 유럽 사회에 흑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노예 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만들어내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권은중 '음식 경제사' 저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