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여권으로 세상 읽기] 1791년 '평화의 문'으로 지어져 나치·분단·통일 거쳐온 역사의 증인

입력 : 2020.06.16 03:05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여권의 안쪽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이미지가 실려 있어요. 베를린에 있는 이 문은 반경 1㎞ 안에 연방의회, 총리실, 주요 대사관, 유대인 학살 추모관 등 독일의 내로라하는 건물들이 쭉 서 있는 핵심 지역에 있지요. 게다가 슈프레강이나 운터덴린덴 거리, 과거 프로이센 왕의 사냥터였던 티어가르텐 공원도 인근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이 유명한 것은 위치 때문만이 아니에요. 독일 역사에서 중요한 여러 장면이 이 문을 무대로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처음 문이 지어진 1791년, 당시 이름은 '평화의 문'이었어요. 문의 상층부에 설치된 '네 마리 말이 끄는 여신의 전차상'이 평화를 상징했죠.
독일의 상징인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독일 여권 표지(왼쪽). 파란만장한 독일 역사의 산증인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그려진 안쪽 페이지입니다.
독일의 상징인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독일 여권 표지(왼쪽). 파란만장한 독일 역사의 산증인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그려진 안쪽 페이지입니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그러나 평화는 쉽지 않았어요.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공하면서 마치 상대방 상투를 잘라가듯 문에서 전차상을 떼어가 버린 거예요. 1814년 독일이 이를 되찾아오긴 했지만 그때부터 문의 상징성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평화가 아닌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이 돼버린 거지요. 당시 전차상을 다시 설치하면서 원래는 없었던 프로이센의 상징, 즉 '검은 독수리'와 '철십자가'를 여신의 창 위에 더한 것이 그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문의 이름이 '브란덴부르크(옛 공국의 이름) 문'으로 바뀐 것도 이 즈음입니다.

19세기 후반 이 문은 줄곧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독일 제국의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군인들은 이 문을 지나 개선했죠. 그러다 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서 나라 이름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꾸었고 이후 브란덴부르크 문 앞 파리저 광장은 혼란과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 됐습니다. 패전의 후유증으로 시위와 파업, 정치적 충돌이 일상화됐어요. 하지만 전제 군주제가 사라진 자리엔 자유로운 대중문화도 싹텄어요.

그러던 1929년 세계를 덮친 대공황과 독일의 대량 실업 사태로 독일 곳곳에 극단주의자들이 발호하기 시작합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던 1933년 1월 30일 밤 나치 돌격대들은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통과하며 '나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자축했어요. 이후 이 문은 나치당의 상징물이 되었지요.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자 이 문은 동베를린(동독) 영토에 포함됐지요. 급기야 1961년엔 문 바로 뒤편에 베를린장벽이 세워졌어요. 문은 문이지만, 출입할 수 없는 문이 돼 버린 거예요. 이때부터 브란덴부르크 문은 분단과 냉전을 상징하게 됐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1989년에야 이 문은 개방됐고 이듬해 독일은 통일됐어요.

지난 230여 년 동안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동독-독일(현재)까지 체제가 다른 6개의 독일을 거쳐왔습니다. 이제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군대 행진도, 선전 구호도, 장벽도 없어요. 동과 서를 나눴던 자리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여신의 전차상 아래는 외출 나온 시민들의 유모차가 지나갑니다. 이 문은 이제야 평화를 찾은 것 같아요. 동서를 잇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진정한 '문'으로 말입니다.


이청훈 '비행하는 세계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