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1978년 첫 등장… 꽹과리·장구·북·징 네 악기가 흥 돋우죠
사물놀이
지난달 28~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사물놀이 창단 멤버인 김덕수(68) 명인(名人)의 데뷔 63주년을 기념하는 음악극 '김덕수전(傳)'이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남자만으로 구성된 '남사당패'였던 아버지를 따라 새미(어른 어깨 위에서 춤추는 무동)로 입문해 국악 신동이라 불렸던 김덕수 명인의 어린 시절부터, 세계 곳곳에 사물놀이를 알리며 공연한 전성기 시절까지 담은 공연이었죠.
김덕수 명인이 처음 사물놀이를 선보였을 때 특유의 역동성과 자유로움 때문에 '국악계의 이단아'라는 소리도 들어야 했지만 이제 사물놀이는 그 빼어난 리듬으로 세계에서 알아주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사물놀이에 대해 알아볼게요.
◇농악에서 출발한 사물놀이
둥둥! 힘찬 북소리가 무대의 정적을 흔듭니다. 이어 꽹과리를 든 상쇠(지휘자 역할을 하는 사람)의 우렁찬 고함과 함께 꽹과리가 쟁쟁 날 선 쇳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덩기덕 쿵더러더러! 장구의 굿거리장단이 얹어지며 흥을 돋우기 시작하더니, 징징! 묵직한 징소리도 함께 빨라지네요. 악기를 두들기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가락의 격랑 속으로 관객들도 몸을 실어 봅니다. 무대 위 연주자들과 관객이 하나 되는 순간 탄성이 절로 터져요.
사물놀이는 말 그대로 사물(四物)로 불리는 꽹과리, 장구, 북, 징 등 4가지 악기가 어우러지는 공연입니다. 농촌에서 이루어지던 대규모 야외 풍물놀이를 무대 위에서 악기 연주가 가능하도록 간소화해서 만든 새로운 공연 형식이지요. 이렇듯 사물놀이의 기원은 풍물굿, 즉 농악(農樂)에서 찾을 수 있어요. 지금이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 버렸지만, 오랫동안 농촌에서는 절기와 풍습에 따라 남사당 같은 전문 집단 등이 악기를 들고 동네마다 돌며 농악을 펼치곤 했습니다.
마을에서 농악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볼거리였어요. 마치 군사들이 전쟁을 하듯 대규모 농악단이 진을 이뤄 행진한다 해서 진풀이로 불렸는데, 다양한 볼거리는 물론 신나게 몰아치는 가락 속에서 고된 노동의 한 시름을 잊을 수 있었죠. 하지만 산업화 바람이 농촌에도 영향을 미치고 농악을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이라 생각하면서 그 풍습은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그러자 4가지 악기로 풍물 가락을 재구성해 독립적인 음악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지금의 사물놀이입니다. 전통음악이니 아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1978년 사물놀이 첫 공연
그렇다면 사물놀이는 언제 처음 시작됐을까요? 불과 42년 전인 1978년 2월,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사랑'이라는 작은 장소에서 사물놀이 공연이 탄생했습니다. 공간사랑은 한국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수근(1931~1986)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로 1971년 지어졌어요. 공간사랑의 소극장은 음악,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예술 장르의 실험적인 무대가 펼쳐진 곳이에요. 지금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이름을 바꾸고 그 명맥을 잇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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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물놀이 창단 멤버이자 명인인 김덕수 선생이 화려한 홀로그램(3차원 입체 영상)과 어우러진 사물놀이 공연을 펼치고 있어요. 왼쪽부터 사물놀이의 네 악기인 징, 꽹과리, 장구, 북을 치는 모습입니다. /연합뉴스
지금도 사물놀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김덕수(장구), 이종대(북), 최태현(징), 김용배(꽹과리)가 사물놀이 창단 멤버로 그 역사적인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날 공연을 지켜본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여주었어요. 이후 전설적인 상쇠, 이광수 등을 영입하며 본격적으로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물놀이는 전 세계에 우리 음악을 알리는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사물놀이가 본격적으로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2년 6월 일본 순회공연을 하면서부터인데요. 같은 해 11월, 미국 댈러스에서 개최된 '세계타악인협회 82년 대회(PASIC-82)'에 참석하면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죠. 사물놀이 창단 멤버들은 4000여명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이날 공연을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꼽는다고 해요. 4개의 작은 타악기가 만들어내는 신명 나는 울림은 삽시간에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열광적인 팬클럽이 결성되기도 했고, 미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사물놀이를 배우는 캠프가 여러 곳 세워질 정도였어요.
['난타'의 모태가 된 사물놀이]
사물놀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비언어 공연인 ‘난타’의 모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난타는 칼과 도마 등 주방 도구를 타악기 삼아 두드리며 배우들이 신명 나는 사물놀이 리듬에 맞춰 추임새를 넣고 당근, 오이 같은 야채를 잘게 부수는 공연인데요. 1997년 첫 무대를 선보인 뒤 국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