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범죄자에서 흑인 인권 지도자로… "폭력엔 폭력으로" 외쳤죠

입력 : 2020.06.10 03:00

맬컴 엑스

미국 전역에서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이제 미 50주(州) 전체, 600곳이 훨씬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열리는 사상 최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고 해요.

그동안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흑인 운동가도 많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급진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던 맬컴 엑스(Malcolm X·1925~1965)입니다. 오늘은 맬컴 엑스의 흑인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 알아볼게요.

백인 교사의 질타에 분노 품게 된 소년

1925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난 맬컴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교 목사이자 열렬한 '백투아프리카 운동'(흑인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의 지지자였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맬컴의 아버지는 자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요.

1964년 3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마주친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오른쪽)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1964년 3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마주친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오른쪽)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동시대에 흑인 인권 운동을 펼쳤던 두 사람은 이날 처음으로 서로에게 약 1분간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맬컴이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돼 가족들은 보험금도 받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마저 신경쇠약으로 보호시설로 보내져 가족 모두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어요. 맬컴을 포함한 형제들은 여러 위탁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맬컴은 학창 시절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한때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도 가졌어요. 하지만 그를 가르치던 백인 교사에게서 돌아온 건 '깜둥이들은 그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차가운 말이었죠. 이후 맬컴은 백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보스턴과 뉴욕을 옮겨 다니며 마약 판매, 매춘 알선, 도둑질 등의 범죄로 생계를 이어갔지요. 결국 맬컴은 어느 백인 가정집을 도둑질하다 덜미를 잡혀 절도죄로 체포되었고 8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소 생활은 맬컴의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어요. 교도소에서 많은 독서를 한 그는 통째로 책 내용을 외우다시피 하며 미국의 역사,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이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으로 불리는 블랙 무슬림(백인과 흑인 분리와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이슬람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요. 맬컴은 흑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백인을 배척하는 이 종교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였던 일라이자 무함마드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자신의 성인 '리틀'을 버리고 맬컴 엑스로 개명했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보통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이 붙여줬다는 사실에 반발,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뿌리를 상징하고자 한 것이었어요.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 비판

1952년 가석방된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정식으로 입단했어요.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지요.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을 했어요. 맬컴 입단 전 4곳에 불과하던 사원은 수년 만에 50여 곳으로 늘었고 신도 또한 500여 명에서 10년 만에 2만5000명으로 늘었어요. 무함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2인자로 천명했습니다. 맬컴은 평화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설파하던 마틴 루서 킹(King·1929~1968) 목사를 '얼간이' '백인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판했고, '만약 누가 나의 발을 밟으면 나도 상대방의 발을 똑같이 밟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비폭력 투쟁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63년 맬컴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 '자업자득'이라고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이것이 슬픔에 빠진 미국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죠. 파문이 커지자 교단에서도 그의 대변인 활동을 정지했어요.

사실 그 당시 맬컴은 교단에 갈수록 큰 실망을 느끼던 상태였습니다. 신도들에게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던 무함마드가 여성 비서들과의 사이에 여러 혼외 자식을 두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는 교단이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너무 나태하다고 보았어요. 맬컴은 교단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지위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되었어요.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결정적으로 맬컴은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순례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태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메카에서 만난 백인 이슬람교도들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이슬람교도를 반기는 것을 보고 '인종과 종족을 초월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정통 수니파 이슬람으로 귀의하고 이름을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로 바꾸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결별합니다. 그리고 '무슬림 모스크 인코퍼레이션'이라는 종교단체와 '아프리카계 미국통일기구'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해 반(反)백인주의를 넘어선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어요. 특히 그는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이라고 연설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표 참여도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교단을 배신한 맬컴을 지속적인 암살 시도로 위협했어요. 결국 1965년 2월 21일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에서 청중 400명에게 연설을 하려던 맬컴은 암살자 3명이 쏜 총에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맬컴이 교단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범인 3명 중 2명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진실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요.

짧은 생을 살다 간 맬컴 엑스는 급진적인 행적으로 평가가 엇갈려요.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흑인 인권을 높이기 위한 운동을 펼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