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00년 전 '봉오동 전투'의 영웅,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죠

입력 : 2020.06.09 03:00

홍범도 장군

지난 7일은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지 100주년 되는 날이었어요. 봉오동 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크게 이겨 독립전쟁 사상 첫 승리를 거둔 역사적인 전투예요. 청산리 대첩과 함께 독립군이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항일 전투이지요. 지난 3월 추진됐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때문에 연기됐던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 봉환(받들어 모시고 돌아옴) 사업도 올해 하반기 다시 추진된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던 홍범도 장군의 무덤이 머나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왜 홍 장군의 유해는 이국 땅에 있는 것일까요?

73세 극장 수위의 사격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한창이던 1941년 6월,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던 히틀러 치하 독일이 소련을 기습 공격하는 독소전쟁이 일어났어요. 얼마 후, 소련 내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크즐오르다시(市)의 당 위원회에 한 동양인 노인이 찾아왔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100년 전 '봉오동 전투'의 영웅,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죠
/그림=김영석
"날 전선으로 보내 주시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오?"

"극장 수위를 하고 있소."

"연세가 많아 보입니다만…."

"일흔셋이오."

담당자들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노인은 병마개를 세워놓고 100보 밖에서 총을 쏴 명중시켰다고 해요. 이 노인은 21년 전 만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뒀던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였습니다.

끝내 대독(對獨) 전선으로 가진 못했지만, 그는 얼마 뒤 고려인(중앙아시아의 한인 동포) 신문 기고문에 이렇게 썼어요. "젊은이들! 모두 무기를 잡고… 용감하게 나서라!"

봉오동·청산리의 승리를 이끌다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불우하게 자랐어요. 젊은 시절 평양 도관찰사가 지내는 관청인 감영 나팔수로 군 복무를 하고 제지소 직원, 사냥꾼이 되기도 했죠.

총을 잘 쏘기로 유명했던 그는 1895년 을미의병 때 강원도 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이어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를 계기로 벌어진 정미의병 때는 함경도·강원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하늘을 나는 홍범도'란 말을 들었어요.

1910년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이후에는 활동 무대를 러시아 연해주로 옮겼습니다. 1920년엔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인 대한북로독군부에서 북로 제1군 사령부장을 맡았지요.

1920년 6월 4일 독립군이 두만강 건너 일본 초소를 습격했습니다. 반격을 펼친 일본군은 독립군의 유인 전술에 걸려들었어요. 7일 일본군은 두만강에서 40리(약 16㎞) 떨어진 봉오동까지 독립군을 추격했어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한 홍범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길목에 숨어서 기다리던 독립군이 동·서·북 3개 방면에서 일제히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에요. '봉오동 전투'의 시작이었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도 땅의 생김새 등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홍범도의 전술은 성과를 거둬,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다소 과장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때 일본군 전사자가 157명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다고 해요. 4개월 뒤 일어난 '청산리 전투'에서도 홍범도는 김좌진·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홍범도는 이후 다른 독립군 세력과 함께 소련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1937년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극동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자, 그는 동포들과 함께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병원과 극장 수위, 공장 노동자 등으로 일하던 홍범도는 광복 불과 두 해 전인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고, 결국 카자흐스탄 땅에 묻혀야 했답니다.


[강제 이주당한 17만여 고려인]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스탈린은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고 의심했어요. 1937년 11월, 17만20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7만여 명이 우즈베키스탄, 9만여 명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만 4만여 명이었어요.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