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교황이 다스리는 나라, 754년 피핀이 바친 땅에서 출발했죠
입력 : 2020.06.03 03:09
바티칸시국
전 세계적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빗장을 걸어 잠갔던 유럽 국가들이 이달부터 속속 관광객을 받을 예정이라고 해요. 특히 지난 3월부터 폐쇄 중이던 이탈리아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바티칸시국(市國·하나의 시로 이루어진 국가)의 바티칸 박물관도 1일부터 다시 개관한다고 밝혔답니다. 바티칸 박물관은 고대 로마·이집트 유물과 르네상스 걸작 미술품을 보유한 세계적 박물관으로, 매년 1억달러(약 1228억원) 안팎의 수입을 올리며 교황청의 재정적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바티칸시국이란 로마 시내에 있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아닌 교황이 지배하는 영세중립국이에요. 면적이 0.44㎢로, 여의도(2.9㎢) 면적의 6분의 1도 안 되는 크기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약 900명에 불과하지요.이렇게 작은 바티칸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까요?
◇754년 교황령 등장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274~337)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었어요. 이후 독실한 그리스도교 귀족들의 기부로 교회 재산은 점점 불어났어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순교한 성인(聖人)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해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후 바티칸은 로마 교황이 거주하는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6세기 이후 로마 귀족들이 너도나도 자기 재산을 기증하면서 교회는 더욱 부유해졌어요. 이렇게 해서 쌓인 교회의 토지 재산을 '베드로의 세습령'이라고 불러요. 교황은 점차 영토 안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정치적인 지배력을 갖게 되었지요.
바티칸시국이란 로마 시내에 있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아닌 교황이 지배하는 영세중립국이에요. 면적이 0.44㎢로, 여의도(2.9㎢) 면적의 6분의 1도 안 되는 크기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약 900명에 불과하지요.이렇게 작은 바티칸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까요?
◇754년 교황령 등장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274~337)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었어요. 이후 독실한 그리스도교 귀족들의 기부로 교회 재산은 점점 불어났어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순교한 성인(聖人)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해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후 바티칸은 로마 교황이 거주하는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6세기 이후 로마 귀족들이 너도나도 자기 재산을 기증하면서 교회는 더욱 부유해졌어요. 이렇게 해서 쌓인 교회의 토지 재산을 '베드로의 세습령'이라고 불러요. 교황은 점차 영토 안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정치적인 지배력을 갖게 되었지요.
- ▲ 754년 교황에게 땅을 바치는 프랑크 왕국 피핀 왕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오른쪽 사진은 0.44㎢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국의 성 베드로 성당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피핀은 '피핀의 증여'를 통해 교회의 보호자가 되길 자처합니다. 자신이 정복한 도시들의 성문 열쇠를 베드로의 무덤 위에 놓고 교회에 바친다는 증여식도 거행했어요. 여기에 호응해 교황은 피핀과 그의 두 아들에게 성대한 도유식(몸에 기름을 발라 병을 낫게 하고 악마를 쫓아낸다는 종교적 의식)을 행해주었지요. 이후 교회는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단절하고 서유럽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피핀의 증여'는 '교회 국가'가 탄생하는 시초가 되었고 도유식은 서유럽 왕들이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는 대관식으로 관습화되었습니다.
◇1870년 이탈리아 통일로 사라진 교황령
그러나 세속적 정치 권력과 교회 권력의 결탁은 새로운 분쟁을 낳기도 했어요. 중세시대 성직자는 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세속 군주로부터 토지를 받은 봉신(封臣·땅을 받은 신하)이기도 했거든요. 특히 962년 교황으로부터 황제 왕관을 받은 독일 국왕 오토 1세는 전략적으로 교회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빌려 지방 제후들을 견제했고 성직자와 수도원장을 직접 임명해 부와 권력을 주고 충성과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어요.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은 서유럽의 세속 군주들과 권력 투쟁을 벌였어요. 교황령은 교황의 권력에 따라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했지요. 14세기엔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긴 적도 있었고(아비뇽 유수·1309~1377), 16세기 초엔 로마 등을 포함한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장악한 적도 있었어요. 1798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해 로마 공화국(1798~1800)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801년 나폴레옹 1세가 교회와의 친선을 위해 '정교(政敎) 협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교황령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어요.
19세기 유럽에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북동부 지역을, 교황은 로마를, 프랑스가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등 분열돼 있었어요.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서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이 전개돼 1861년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고, 1870년에는 베네치아와 로마 교황령을 모두 합친 '통일 이탈리아'가 완성됐습니다. 당시 교황 피우스 9세는 합의되지 않은 합병에 반발했으나 결국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어요.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 내 성 베드로 성당에서만 지내게 됐고,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지요.
◇무솔리니와 맺은 '라테란 협정'으로 탄생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 불편한 관계가 해소된 것은 파시즘 정권을 수립한 무솔리니(1883~1945) 때입니다. 무솔리니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어요. 학교, 병원 등에 십자가를 걸고 초등학교에서는 가톨릭 교리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지요. 또 신학생들의 병역을 면제해주었습니다.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청 특사 가스파리 추기경 사이에 '라테란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이 협정으로 바티칸시국은 교육, 세금, 주교 임명, 교황 선거 등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인정받았어요. 교황청은 이탈리아 정부에 바티칸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교황령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도 받았어요. 이때부터 교황령은 바티칸시국으로 한정되었고, 현재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특별 헌금과 바티칸 박물관 입장료, 관광 수입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