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여권으로 세상 읽기] '왕의 상징'으로 신성시… 수송·전투용 넘어 외교용으로도 활약

입력 : 2020.06.02 03:05

태국의 코끼리

태국은 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여서 여권에서도 국왕과 관련되거나 왕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군주제는 국가의 최고 권력을 왕이 가지는 정치제도를 뜻하죠. 태국에서 왕을 상징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코끼리예요. 국민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태국은 코끼리를 아주 상서로운 동물로 여긴답니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흰 코끼리 꿈을 꾸고 석가모니를 낳았다고 해서 생긴 믿음이죠. 태국 여권에 코끼리가 배경으로 실려 있는 것도 이런 문화적 전통 때문이에요.

게다가 태국 왕실은 흰 코끼리를 국왕의 상징으로 삼아왔죠. 국왕이 외국에 선물로 코끼리를 보내는 일도 있었답니다. 미국 대통령에게도 보내려고 했대요. 영화배우 율 브리너가 태국 국왕으로 출연한 영화 '왕과 나'(1956)에도 잠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태국 왕실에서 일하게 된 영국인 가정교사가 겪는 이야기를 담은 재미있는 영화였죠. 때는 1861년, 당시 국왕 라마 4세가 미국에 편지를 보냅니다.
태국 여권 속지에는 코끼리가 그려져 있어요. 불교 국가라 코끼리를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고, 왕실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죠.
태국 여권 속지에는 코끼리가 그려져 있어요. 불교 국가라 코끼리를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고, 왕실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죠.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대통령 각하, 귀국에 코끼리가 없다는 사실을 듣고 어린 코끼리들을 선물로 보내려고 합니다. 코끼리들이 미국에 도착하면 숲에 풀어 그 개체 수가 늘거든 수송용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태국엔 코끼리가 항해 중 먹을 건초, 식수 등을 적재할 크기의 선박이 없으니 귀국에서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선박이 오는 대로 코끼리를 출발시키겠습니다."

이 국서(國書·국가원수의 문서)는 이듬해 미국에 도착해요. 당시 대통령은 제16대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었죠. 링컨은 나라 전체가 뒤집힌 남북전쟁(1861~1865) 와중에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신합니다.

"폐하께서 미국 국민에 대한 우정의 표시로 보내주신 친서를 잘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코끼리를 키워보라고 자상하게 제안하신 데 대해 실용성이 있다면 주저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미국은 위도상 코끼리가 살기에 적당치 않고, 수송은 증기기관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폐하가 보여주신 우정에 감사하며…. 당신의 좋은 친구 에이브러햄 링컨."

이렇게 해서 국왕의 코끼리 외교는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열강이 동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경쟁하던 19세기, 코끼리를 선물로 보내서라도 우호 세력을 늘려 태국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국왕의 고민을 엿볼 수가 있어요. 당시 태국에서 코끼리는 교통수단은 물론 공사용·전투용으로 폭넓게 사용되는 중요한 동물이었거든요. 특히, 흰색 코끼리는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져 왕실의 사랑을 받았어요. 몇 해 전 태국 국왕 장례식 때는 왕실 소유 흰색 코끼리 여러 마리가 모두 조문 행렬에 동원됐어요. 흰 코끼리는 실제로는 이름과 달리 피부가 약간 붉은빛이 돌아서 '핑크 코끼리'로도 불려요.

태국 여권에는 왕실 선박(Royal barge) 이미지도 실려 있는데요. 국왕 전용 배인 '수판나홍(황금백조라는 뜻)'호입니다. 노잡이 50명 등 승무원 총 66명이 국왕을 태우고 이동하는 선박이에요. 전체 길이는 46m이고 무게는 15t인 이 배는 놀랍게도 1911년 대형 티크목 한 그루를 그대로 베어서 건조한 것입니다. 수판나홍은 지난해 태국 방콕의 강 위에 금빛 자태를 드러내기도 했어요. 새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수상 퍼레이드가 있을 때였답니다.


이청훈 '비행하는 세계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