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민심 살피려, 女心 잡으려… 한밤중에 궁궐 나선 임금들

입력 : 2020.06.02 03:09

미복잠행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잠정 중단됐다 지난 27~28일 재개됐던 궁궐 야간관람 이벤트 '경복궁 별빛야행'과 '창덕궁 달빛기행'이 물류센터 집단 감염 확산으로 또다시 취소됐어요.

이 행사는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전부 매진될 만큼 인기가 많은 행사예요. 임금의 궁궐을 밤에 구경한다는 게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일 거예요. 실제 조선시대에는 밤에 궁궐과 도성에서 사람이 다니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임금이나 왕세자는 은밀하게 궁궐을 나와 밤에 어디론가 나서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해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신라 소지왕이 은밀하게 찾은 곳

서기 500년 가을, 신라 제21대 왕인 소지마립간이 수행원과 함께 남몰래 궁궐을 나섰어요. 옷차림도 평범한 백성의 복장이었지요. 이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것을 '미복잠행'(줄여서 '미행')이라고 해요. 남루한 옷차림의 '미복(微服)'과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다닌다는 '잠행(潛行)'을 붙여 만든 말이지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김영석

소지왕의 목적지는 오늘날 경북 영주지역인 날이군이었어요. 그곳에 사는 벽화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소지왕은 지금의 안동지역인 고타군에서 만난 어느 노파로부터 뜻밖의 충고를 듣게 돼요. 왕이 여인을 찾아 몰래 평복 차림으로 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이는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조언이었어요. 그 뒤 소지왕은 미행을 하는 대신 벽화를 궁으로 맞이해 들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와 '동국통감'에 기록된 내용으로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임금이 비밀리에 궁궐을 나섰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양녕대군, 세자 시절 잠행 핑계로 못된 짓

조선시대에도 임금이 잠행을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왕이 미행하기를 좋아해서 일부 성문을 지키는 군사는 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쓰여 있고, 밤에 환관을 거느리고 몰래 사냥을 나가는 등 여러 차례 미행을 나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영조실록'에도 혜정교(현 종로구에 있는 다리) 서쪽 동네 이름이 '일영(日影)'이 된 유래를 과거 성종이 그곳으로 미행을 다니다가 붙인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왕세자가 궁궐에서 부왕(父王) 몰래 잠행을 나간 기록도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에요. 양녕대군은 세자였을 때 궁궐 담장을 넘기도 하고 개구멍으로 빠져나가기도 했어요. 태종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고도 밤에 궁궐을 빠져나가서 부적절한 처신을 계속하다 결국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지요. 또 '계서야담' 등 야사(野史)에는 조선 제9대 왕 성종, 제22대 왕 정조 등이 궁궐 밖 민심을 살피고 백성들 고충을 들어주기 위해 미행에 종종 나섰다는 일화가 기록돼 있어요.

◇밤엔 함부로 통행할 수 없다

사실 왕이나 왕세자가 궁궐 밖으로 잠행을 나서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어요. 자칫 왕의 안전에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신하들에게 질책을 들을 수도 있고요.

조선시대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답니다. 조선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궁성 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가 뜰 때 열며, 도성 문은 인경(밤 10시쯤)에 닫고 파루(새벽 4시쯤)에 연다' '2경(밤 9~11시) 후부터 5경(새벽 3~5시) 이전까지는 높고 낮은 모든 벼슬아치는 출행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어요. 이를 어겼다가 잡히면 치안 관서인 경수소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체로 왕은 궁궐에서 밤에 신하들과 공부하고 토론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야대(夜對)'를 즐겼다고 해요.

[밤에 공부하며 토론하는 '야대'… 조선 성종은 500회나 즐겼어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한밤중에 이야기하는 야대는 성종이 가장 많이 열었다고 해요. 약 500회 가까이 벌였지요. 조선 후기 대학자인 정약용(1762~1836)의 시 ‘중희당에서 야대를 마치고 물러나와 짓다’를 보면 정약용이 1799년 5월 정조 임금과 창덕궁에서 야대를 마치고 물러난 시각은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