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무대 위를 내달리는 말… 배우 3명이 움직이는 '퍼핏'이래요

입력 : 2020.05.29 03:00

[연극 '워 호스']
1차 대전 군마로 차출된 말 '조이'와 소년 '앨버트'의 우정 담은 원작 소설
영국 국립극장이 연극으로 만들었죠

거대한 나무 말 인형에 사람 들어가 세밀하게 연기하는 '퍼핏' 기술 주목
전세계 권위있는 시상식 석권했어요

따그닥, 따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 한 마리가 무대에 등장합니다. 소년이 다가가 말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 듯 긴 목을 위아래로 흔들더니 소년의 가슴팍에 비벼댑니다.

연극 '워 호스(War Horse)'는 제목 그대로 군마(軍馬·군대에서 쓰는 말) '조이'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말이 어떻게 무대에 올라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냐고요? 물론 실제 말은 아닙니다. 실물 크기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말 모양 머리와 몸통에 배우들이 들어가서 연기를 하죠. 어떻게 이런 동물의 생생한 모습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던 걸까요?

전 세계가 극찬한 무대예술

영국 출신 극작가 피터 섀퍼(Shaffer·1926~2016)의 연극 '에쿠우스(EQUUS)'에는 주인공 소년 '알런'과 교감하는 말이 한 마리 등장해요. 라틴어로 '말'을 뜻하는 '에쿠우스'라는 제목처럼 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데, 일곱 배우가 가면을 쓰고 마임(몸짓과 표정만으로 표현하는 연기)으로 직접 말을 연기하죠.

군마 '조이'와 소년 '앨버트'의 우정을 그린 연극 '워 호스(War Horse)'의 한 장면.
군마 '조이'와 소년 '앨버트'의 우정을 그린 연극 '워 호스(War Horse)'의 한 장면. 나무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 말 퍼핏(인형)을 움직이기 위해 배우 3명이 인형의 다리와 꼬리 등을 붙잡고 연기해요. /국립극장
극작가 섀퍼는 말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위해 세심하게 지문(연극에서 인물의 동작과 표정, 심리 등을 지시하는 글)을 써 놓을 정도로 말의 비중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실제로 무대에서 말의 탈을 쓴 배우들이 등장하면 엄숙한 전율마저 느껴질 정도죠.

반면 연극 '워 호스'는 사람이 말을 흉내 내는 마임과는 다르게 실물 크기 말을 무대에서 보는 듯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요. 실제 말이 하기엔 어려운 연기까지 가능하게 한 비결은 바로 퍼핏(puppet·연극에 사용되는 인형) 제작 기술에 있습니다.

'워 호스'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소설가 마이클 모퍼고(Morpurgo·1943~)의 동명(同名) 소설을 영국 국립극장이 무대화한 작품이에요. 2007년 처음 공연된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 11국, 97개 도시에서 800만명 이상이 관람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어요. 2008년 영국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로런스 올리비에상 두 부문(무대디자인·안무), 2011년 미국 토니상 다섯 부문(작품·연출·무대디자인·조명디자인·음향디자인)을 비롯해 전 세계의 권위 있는 극예술 시상식을 석권하며 작품성을 입증했어요.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2011년 영화로도 제작했습니다.

'워 호스'는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소개된 적이 있는데요. 영국 국립극장이 화제의 작품을 실황으로 녹화해 상영하는 'NT(National Theatre) Live'를 통해 지난 2014년 처음 선보였어요. 오는 7월 내한 공연이 예정돼 있었지만 아쉽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공연이 취소되었지요.

배우 3명이 말 한 마리를 연기

'워 호스'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군마로 차출된 말 '조이'와 소년 '앨버트'의 모험과 우정을 담은 이야기예요.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경매로 사온 '조이'와 만난 '앨버트'는 교감하며 각별한 우정을 나눕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조이를 기마대(말을 타고 직무를 수행하는 군대) 장군에게 군마로 팔아버리며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게 돼요.

참혹한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살아남는 조이의 모험에 관객들은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 조이를 찾기 위해 참전한 앨버트가 마침내 조이와 만나고, 모든 역경을 딛고 마주 선 조이와 앨버트의 모습에서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어요.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에 힘을 더하는 건, 나무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 말 퍼핏과 퍼핏을 연기하는 퍼피티어(배우)들의 정교한 연기예요. '조이'를 움직이기 위해 배우 3명이 인형 안에 들어가 연기하는데, 말의 몸통에 두 사람이 들어가서 꼬리와 다리를 움직이고, 또 한 사람이 말의 목을 잡고 움직인답니다. 놀란 말이 발을 구르다가 위로 솟구치며 뒷발로 일어나거나,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은 마치 실제 말을 보는 것 같아요. 앨버트가 말등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하는 장면은 공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큼 생동감이 그대로 느껴지지요.

'워 호스'의 놀라운 무대예술은 퍼핏 전문 회사인 '핸드스프링 퍼핏 컴퍼니'의 놀라운 아이디어 덕분에 가능했어요. 퍼핏을 디자인한 '핸드스프링 퍼핏 컴퍼니'는 독보적인 퍼핏 전문 공연 회사입니다. 1981년 남아프리카에서 세워진 이 회사의 대표 에이드리언 콜러는 아프리카 말리 지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훌륭한 인형극 전통을 기반으로 퍼핏 제작 회사를 만들었는데요. 1995년 공연된 '아프리카의 파우스트'에 등장한 하이에나 한 마리로 관객들의 시선을 단박에 빼앗았답니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앞가슴, 체스를 둘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앞발까지 마치 살아 있는 하이에나를 눈앞에서 보는 듯한 거예요.

퍼핏 '조이'의 탄생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핸드스프링 퍼핏 컴퍼니'의 대표 에이드리언 콜러는 "나무와 헝겊으로 만든 사물에 움직임을 불어넣어서 관객에게 그것이 살아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퍼핏 공연의 마법이라고 말합니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