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나치와 싸운 프랑스 저항군 22만명… 장 물랭이 지휘했죠

입력 : 2020.05.27 03:00

[레지스탕스]
나치 독일, 1940년 6월 佛 점령하자
드골, 라디오로 대국민 호소문 발표
국민들은 지하운동으로 대항했어요

초기엔 벽보 훼손 등 즉흥적 활동하다 철도 파괴 등 무력 저항으로 조직화
나치에 맞선 6만여 명 훈장 받았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됐을 때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했던 세실 롤탕기 여사가 지난 8일(현지 시각)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프랑스어로 저항(Résistance)이란 뜻을 가진 레지스탕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에 저항해서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난 지하운동 단체를 뜻하는데요. 롤탕기 여사는 유모차에 총기와 폭탄, 비밀 지령을 담은 문서를 몰래 싣고 다니며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답니다. 과연 레지스탕스의 출발점이었던 프랑스에서는 당시 어떠한 일들이 있었을까요?

무기 숨기고 도피 돕던 레지스탕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어요.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 반도 안 돼 프랑스는 6월 22일 독일과 휴전 조약을 맺었어요.

독일과의 휴전 협정 조인에 앞장섰던 인물은 당시 프랑스 새 총리였던 페탱(Pé-tain·1856~1951)이었어요.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 동쪽에 있는 요새 도시였던 베르됭을 독일군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낸 공으로 '전쟁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었죠.

드골의 밀사이자 전쟁 전 최연소 도지사였던 장 물랭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하나로 통합해 '국민 영웅' 으로 불려요.
드골의 밀사이자 전쟁 전 최연소 도지사였던 장 물랭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하나로 통합해 '국민 영웅' 으로 불려요. 오른쪽 사진은 1944년 프랑스 비시정부 군인에게 체포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하지만 휴전 협정 이후 그가 보인 행보는 그를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전락시켰습니다. 프랑스 남부 도시 비시에서 페탱은 국가 원수로 군림하며 적극적으로 나치 독일에 협력했어요. '비시 정부'는 수많은 프랑스 노동자를 독일 공장으로 내보냈고, 7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독일에 넘겼습니다. 비시 정부는 형식상으로는 합법 정부였지만 나치의 '괴뢰 정부'나 다름없었던 것이에요.

페탱이 방송을 통해 독일과의 휴전 의사를 내비치자, 한때 그의 부관이었던 샤를 드골(De Gaulle·1890~1970) 장군은 6월 18일 영국의 BBC 라디오 방송에 등장해 '프랑스 국민은 전투에 졌을 뿐이지 전쟁에 지지 않았다'라고 선언했어요. 그리고 이 드골의 호소문을 계기로 나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저항이 시작됐습니다.

초기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소수였고 활력도 크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영화관에서 뉴스 상영 때 야유 한다거나 독일 점령 당국의 선전 벽보를 훼손하는 등 즉흥적인 항독(抗獨) 행위를 펼치기도 했지만, 점차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프랑스 군대가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들을 숨기거나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 군인과 영국 군인들의 수용소 탈출을 돕기도 했습니다. 또 철도와 전화선 등 주요 설비를 파괴해 독일군 업무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 지하신문의 발간은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가장 튼튼하게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어요. 그들은 독일과 비시 정부의 선전 활동에 맞서 다양한 역(逆)선전 활동을 펼쳤고, 점령 당국(독일)의 거짓 정보나 정보 조작, 은폐에 맞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어요.

레지스탕스를 통합한 장 물랭

레지스탕스 운동의 규모는 1941년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됐어요.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1939년 체결된 독소불가침 조약(독일·소련 양국이 서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약속한 조약)으로 인해 항독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웠는데요.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먼저 약속을 어기고 소련을 침공하자 프랑스 공산주의자들도 대거 레지스탕스 운동에 합류했습니다. 또 1942년 강제로 전쟁터에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노동제가 도입되자 많은 프랑스 젊은이가 독일의 강제 징발을 피해 산속에 들어가 유격대원이 되었어요. 레지스탕스 규모는 약 22만 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커졌어요. 이는 당시 프랑스 성인 인구의 약 1%에 해당한다고 해요.

프랑스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갈수록 여러 개의 산발적인 조직으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조직적이면서도 통합된 항독 활동을 위해서는 이를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있었죠. 이때 단일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드골의 밀사(비밀 명령을 받고 파견되는 사람)이자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인에게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장 물랭(Moulin·1899~1943)입니다.

그는 전쟁 전 최연소 도지사였는데, 1940년 6월 독일군이 자신의 지역(외르에루아르)을 침략했을 때 협력을 거부했어요. 이를 이유로 독일군에 구타당하고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석방 이후 물랭은 본격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국저항평의회라는 거대한 '지하 의회'를 비밀리에 개최해 레지스탕스의 결속력을 확인했고, 이후 프랑스 국내의 모든 레지스탕스 운동은 하나로 통합됐어요. 하지만 자신은 그해 6월 게슈타포(나치 정권의 국가경찰)의 급습으로 결국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어요. 1964년 그의 유해가 프랑스의 국립묘지인 판테온에 안치된 것은 그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평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해줘요.

1944년 8월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되자 반역자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시행되었습니다. 비시 정부의 수반이었던 페탱은 1945년 8월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돼 좁은 독방 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해방 직후 몇 년간에 걸쳐 비시 정부의 핵심 인물들을 포함해 반역자 약 9만 800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1만 명 안팎의 부역 혐의자가 처형되었습니다. 레지스탕스를 포함해 나치에 저항한 프랑스인 6만여 명에겐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