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日이 대륙 침략 위해 건설… 광복 후 첫 국산기차 만들었죠

입력 : 2020.05.26 03:00

[용산역 철도공장]
일제가 용산 땅 380만㎡ 빼앗아 군수물자 등 오가는 철도기지 건설
한반도 최대 철도공장도 세웠어요

1946년 한국인 직원들 손으로 '조선해방자호' 만드는 데 성공했죠

정부가 최근 서울 용산역과 인접한 옛 정비창 부지 51만㎡(약 15만4275평)에 주택 8000가구가 들어설 '미니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어요. 이 소식을 듣고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빈 땅이 남아있었단 말이야?"라며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용산역 건물 서쪽으로 펼쳐진 이 땅은 사실 우리 근대사의 아픈 사연이 많이 쌓인 곳이랍니다.

일제, 용산에 '철도 타운' 건설

"왜인(일본인)들이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용산)에 멋대로 군용지란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해 우리나라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대한제국기 선비 황현(1855~1910)이 1904년 '매천야록'에 기록한 내용이에요.

[뉴스 속의 한국사] 日이 대륙 침략 위해 건설… 광복 후 첫 국산기차 만들었죠
/그림=김영석
당시 러일전쟁(1904~1905년 한반도와 만주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일본이 한국과 강제로 맺은 동맹·협력 문서)를 구실 삼아 한반도 곳곳에서 넓은 땅을 군용지로 내놓으라고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했어요.

그중 용산역 일대 부지는 990만㎡에 이르는 광대한 규모였습니다. 일본군이 제시한 보상비는 고작 3.3㎡(1평)당 2전이었는데요, 당시 쌀 한 되(약 1.8L)가 20~25전이었으니 거저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 정부와 주민의 저항에 부딪혀 용산의 군용지 수용은 380만㎡가 됐고, 많은 주민은 하루아침에 살던 터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용산에서 그들이 한국인의 피눈물 위에 건설한 것은 '철도 타운'이었습니다. 연구서 '철도와 근대 서울'을 쓴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한반도에 철도망을 만들어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침략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일제가, 서울 도성 남쪽인 용산에 한국 철도의 핵심 기지를 만든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용산역은 경인선, 경부선, 호남선 등 많은 노선의 시발점이거나 통과역인 교통의 요지가 됐습니다. 수많은 일본군 병력과 군수물자가 이 역에서 태우고 내려졌죠.

용산역을 기점으로 동쪽에는 철도국, 철도 관사, 철도 병원 등이 빼곡하게 들어섰습니다. 이 시설 바로 옆에는 일본군사령부가 자리 잡았죠. 그리고 서쪽에 들어선 것이 바로 '철도 공장', 최근 미니 신도시가 들어선다고 발표된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한반도 최대 규모 '용산 철도 공장'

일제는 1905년 용산역 서쪽에 철도 차량 수리를 위해 '용산공작반'을 설치했습니다. 1923년 '경성 공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죠. 기관차와 객차·화차를 직접 제작하고 수리하던 한반도 최대의 철도 공장이었어요.

용산 철도 공장에서 한국인 직원은 부서 배치와 기술 습득, 봉급 수령 같은 모든 면에서 일본인 직원보다 훨씬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위 기술직급인 기수(技手)직의 경우 일본인의 평균 월급이 126원이었던 데 비해 한국인은 68원으로 54% 정도에 그쳤어요.

하지만 1945년 광복이 되자 용산 공장의 한국인 직원들은 일제 치하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을 총동원, 다음 해 '조선해방자호' 기차를 만들어 운행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해방자호는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열차였지요. 이후 철도 공장은 '서울철도국 용산공작창'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0년대부터는 생산 대신 정비만 담당하는 '정비창'의 역할을 했습니다. 2011년에는 이 임무마저 경기 고양의 행신역 등 다른 곳으로 넘긴 뒤 철거됐고 철도 공장의 100여 년 역사를 마쳤답니다.


[용산역 인부로 취직했던 이봉창]

1932년 1월, 일제 침략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일왕을 향해 폭탄 투척 의거를 했던 인물을 알고 있나요? 바로 독립운동가 이봉창(1900~1932) 의사입니다. 그런 그가 의거 전에 일했던 곳이 바로 '한국 철도의 중심지'였던 용산역이었답니다.

이봉창 의사는 1918년 용산역 조차계(操車係)의 말단 인부로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은 일본인과 달리 승진이 지체돼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다 중상을 입는 일이 잦았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왜 이런 차별을 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그는 4년 8개월 만에 사직했고, 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