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미술관에 갔어요] 해와 달·낮과 밤의 공존… 상식의 틀 깬 '초현실' 맛봐요

입력 : 2020.05.23 03:00

[르네 마그리트 특별展]
20세기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작품 AR 등 최첨단 기술로 체험하는 전시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묘사 즐긴 화가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그의 작품은 영화 '매트릭스' 등에도 영감 줬대요

초현실은 무엇일까요? 현실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 어쩌면 그것은 꿈꾸는 일과 비슷합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 안의 욕망이나, 이뤄질 수 없지만 근사한 전망 같은 것을 그려내는 일이기 때문이죠.

'초현실' 하면 첫손에 꼽히는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벨기에 출신 르네 마그리트(1898~1967)입니다. 날아다니는 거대한 암석, 공중에 뜬 여러 개의 달, 비처럼 쏟아지는 정장 차림의 수많은 신사 등 독특한 그림으로 유명한 작가죠. 활달한 상상력이 담긴 그의 그림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에도 영감을 줬다고 해요.

기괴하지만 불가사의한 힘을 드러내는 그의 작품을 미디어아트와 증강현실(AR) 등으로 구현한 체험형 전시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이 서울 인사센트럴뮤지엄에서 9월 13일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원화(原畫) 전시는 아니지만, 마그리트의 대표작을 최첨단 기술로 재해석해 그가 캔버스에 남긴 초현실을 더욱 초현실처럼 펼쳐놓았답니다. 이런 형태의 전시를 '이머시브(immersive) 전시'라고 부르는데요. 벽면에 낱개의 그림을 배열하는 전통적 방식이 아닌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에워싸거나 보는 사람의 적극적인 체험을 유도함으로써 관람객의 몰입을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진1~4
①160점의 그림을 40분의 미디어아트로 구현한 '이머시브 룸' ②미디어아트로 재탄생한 '빛의 제국' 시리즈 ③거대 조형물로 제작한 '이미지의 배반' ④시각적 혼란을 유도하는 '미스터리 룸' /지엔씨미디어
600평 규모의 전시장은 말 그대로 초현실의 장(場)이에요. 복제화, 조형물, 사진, 다큐멘터리, 영상 등으로 가득 채워냈어요. 특히 마그리트의 그림 160점을 40분의 영상으로 제작해 빛으로 투사하는 '이머시브 룸'〈사진1〉은 그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겠네요.

100여 평 전시장 벽면과 바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이 솟아오르고, 수만 개의 우산과 모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립니다. 거기에 피아노 야상곡, 세계적 바이올린 연주자 이츠하크 펄먼의 바이올린 선율이 그림과 어우러지며 시각적 충격을 감동으로 연결시키죠. 사진 속 그림은 일몰 풍경을 담은 르네의 '연회'(1967)라는 작품이에요. 동시에 옆 벽면에는 달밤 풍경을 그린 '백지'(1967)가 떠 있어요. 한 공간에 해와 달이 공존하는 것이죠.

르네는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장면을 즐겨 그렸어요. '빛의 제국' 시리즈가 그 예입니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 화가가 그린 시리즈인데요. 같은 제목으로 27점의 그림을 남겼답니다. 평범한 저택의 풍경이지만 그림 안에 낮과 밤이 공존하고 있어요. 그림 위쪽으로는 뭉게구름 자욱한 낮, 아래는 어둠에 잠긴 집이 숲에 둘러싸여 있어요.

사진2는 '빛의 제국' 그림 5점을 음악과 함께 영상으로 재해석해 명상적 분위기의 미디어아트로 채운 공간이에요. 유선형 벽면에 그림이 빛으로 투사되고, 거울 필름으로 마감 처리된 바닥까지 그 빛이 너울대면서 신비로운 느낌을 더합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밤과 낮이 공존하는 풍경으로부터 우리는 경이롭고 매혹적인 힘을 느끼는데, 나는 이 힘을 시(詩)라고 부른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해요.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있어요. 언어 규범 안에서 쓰이면서도, 시적인 효과를 위해 맞춤법이나 때론 오탈자까지도 용인해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시는 언어를 뛰어넘는 언어라고 할 수 있어요. 언어로 이뤄져 있지만 때로 언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시와 긴밀히 연결돼 있는 듯합니다. 1962년 인터뷰에서 마그리트는 "당신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지요. "내 작품이 전하려는 것은 한 편의 시(詩)라고 말하겠습니다."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아마 '이미지의 배반'(1929)일 거예요. 그림 제목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더 유명하죠. 파이프 담배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 밑에 불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았답니다. 사진3은 이 그림을 거대한 조형물로 제작해놓은 포토존이에요. 실제 '파이프'라는 물건과 단어 '파이프'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죠.

이처럼 르네 마그리트 작품은 아주 단순한 부정을 통해 의문을 제기하고, 세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친숙한 일상의 사물을 예기치 않은 상황에 배치해 사고(思考)의 일탈을 유도하기도 하고요. 파이프가 아니라면, 대체 이것은 무엇일까요? 파이프 앞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확신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거울'에 대한 관심을 낳았습니다. 1937년 그린 '금지된 재현'이라는 그림에는 거울 앞에 선 남성의 뒷모습이 담겨 있어요. 거울 앞에 섰으니 당연히 남자의 정면이 담겨야 하지만, 거울 안에 정면이 아닌 뒷모습을 그려내며 거울의 특성을 부정하고 있어요. 사진4는 이 같은 거울의 비밀을 신비롭게 구현해놓은 '미스터리 룸'이에요.

생전 그가 남긴 "내게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은 그의 모든 작업을 꿰뚫고 있어요. 사물을 비추는 것은 거울뿐만이 아니에요. '눈'도 마찬가지죠. 푸른 하늘과 구름이 담긴 눈동자를 그려낸 1935년작 '잘못된 거울'도 이 같은 인식을 보여주고 있어요. 잘못된 거울이라니,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는 것이 어떤 것을 숨기고 있는지 보고 싶어합니다." 명쾌한 대답 대신, 그는 관람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그의 초현실은 여전히 미지의 세상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