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식탁 위 경제사] 신대륙서 건너온 '불길한 음식', 지금은 사료로 더 많이 쓰여요

입력 : 2020.05.22 03:09

[옥수수]

껍질 벗기는 것이 제물로 바쳐진 사람 피부 벗기는 모습 연상시킨다며
유럽인이 불길하다 외면하던 작물

17세기 베네치아 상인에 의해 확산돼 200년간 인구 2배 이상 느는 데 기여
이젠 생산량 60%를 사료로 재배해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전 세계적인 식량난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요. 최근 UN 산하 FAO(식량농업기구)와 WHO(세계보건기구), WTO(세계무역기구)는 공동으로 성명을 내고 과도한 식료품 수출 제한 때문에 국제적인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답니다. 이 같은 상황은 식량 생산 자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각국이 국경 봉쇄 조치를 펼치면서 국가 간 농산물 이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해요.

식량난은 과거 전 세계 인류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문제였어요. 그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음식이 바로 옥수수예요. 오늘은 옥수수를 둘러싼 경제사 이야기를 해볼게요.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옥수수

전 세계에서 연간 10억t 이상 생산되는 옥수수는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중요한 식량입니다. 생산량으로 따지면 전 세계 1위이고 쌀의 2배, 밀의 1.5배에 이르지요. 쌀이나 밀과 마찬가지로 볏과(科) 한해살이풀이에요.

그런데 쌀·밀과 달리 옥수수는 생장 기간이 80~100일 안팎으로 짧고 토질을 가리지 않습니다. 당연히 다른 곡식에 견줘 농업 생산 효율성이 매우 높지요. 옥수수 한 알을 심으면 보통 100~300알을 거둘 수 있는데요. 반면 쌀이나 밀의 생산 효율성은 한 알에 30알 정도에 불과합니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일행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 첫 만남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옥수수는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한 음식이었지만, 옥수수의 높은 생산성을 주목한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어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일행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 첫 만남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옥수수는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한 음식이었지만, 옥수수의 높은 생산성을 주목한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어요. /미 의회도서관

1492년 스페인이 중남미 서인도제도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옥수수는 구대륙(유럽·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한 곡식이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옥수수를 유럽에 처음으로 가져왔지만 거의 먹지 않았어요. 그들은 잉카와 아즈텍 등 중남미 원주민들이 산 사람을 제물로 삼는 잔혹한 제의를 목격했는데 사람 피부를 벗기는 모습과 옥수수 껍질 벗기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껴 옥수수를'불길한 음식'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옥수수의 탁월한 생산성을 눈여겨본 유럽인은 무역을 중시하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이었습니다. 숫자에 밝았던 그들은 종교적 편견 때문에 옥수수를 멀리한 스페인 사람들과 달리 투입 노동력 대비 생산성이 높은 옥수수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럽 최초로 시칠리아섬에서 옥수수를 키워 자기들이 먹는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줘 가격이 2배 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17세기 베네치아는 자국에서 생산된 곡물의 15~20%를 외국에 수출하기도 했지요. 반면 같은 시기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의 곡물을 국내에서만 소비했습니다.

빵도 되고 돈도 되는 옥수수는 이후 부국강병에 골몰하던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옥수수 덕분에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인구도 17세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여기엔 신대륙에서 건너온 감자도 큰 역할을 했지요. 1000년 넘게 줄곧 2억에 머물던 전 세계 인구는 1650년 약 5억이 돼 두 배 이상으로 뛰었습니다. 1850년에는 10억명을 기록했어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식량난이 올 것이라는 영국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암울한 예측도 이즈음 나왔지요.

가축 사료를 위해 옥수수 일구다

인구 폭증의 시대에 옥수수는 식량이 아닌 역할로 또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사람이 아닌 소·돼지·닭 같은 가축을 먹이는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1905년 독일에서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주는 인공 질소 비료 생산에 성공합니다. 그전까지 세계 각국은 동물 분변에서 유래한 인광석을 남미에서 수입해 비료로 썼지만, 이제는 대규모로 비료를 합성해서 식물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게 된 거예요. 인류는 드디어 기아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난 인류는 새로운 먹거리를 욕망했습니다. 바로 고기였어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대중은 전투 식량인 통조림이나 값싼 염장 고기 대신 진짜 고기를 원했습니다. 고기가 현대사회 중산층을 대표하는 취향의 하나가 된 거지요.

그러자 많은 기업이 고기를 싸게 많이 생산하기 위한 방안으로 옥수수에 주목했습니다. 재배 비용이 저렴한 데다 옥수수의 당분이 가축의 살을 찌우는 데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가축 사료를 생산하기 위해 미국 중부의 광대한 농토가 옥수수밭으로 바뀌었습니다. 육우는 이제 풀 대신 곡물인 옥수수를 먹고 20~30개월 만에 도축되고 있어요. 풀을 먹도록 진화한 소가 갑작스레 옥수수를 먹으면서 소화기관에 장애가 생기는 문제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곡식 가격을 낮추기 위해 생산지를 다변화했습니다. 브라질의 아마존 숲과 인도네시아의 숲처럼 생태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이렇게 개간된 땅에서 옥수수·콩 등 사료용 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했습니다. 병충해를 막기 위해 유전자를 변형한 GMO 옥수수도 만들어졌습니다. GMO 옥수수 역시 인간이 먹기 위한 식량보다는 가축 사료나 액상 과당 같은 식품첨가물 제조를 위해 사용됐어요. 현재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청량음료와 가공 음식에는 값비싼 설탕 대신 액상 과당이 많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옥수수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2% 증가한 11억4000t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하지만 이 중 약 60%는 가축 사료용이고 식용은 10% 안팎으로 적은 비율을 차지하지요.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아직도 지구촌에서 매년 5만여 명이 굶주림과 관련된 영양실조나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답니다. 이제는 미국도 코로나 사태로 인한 대규모 실업 때문에 식량 배급을 받으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요. 옥수수 생산량은 늘지만 여전히 배고픔을 걱정해야 하는 현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권은중 '음식 경제사' 저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