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산둥반도 차지하려는 일본의 21개조 요구가 도화선 됐어요

입력 : 2020.05.20 03:09

[중국의 5·4 운동]

1919년 베이징대 학생 중심으로 발발
중화민국 수립 후 봉건주의 회귀에 천두슈 등 지식인 '신문화 운동'펼쳐
日 침략 승인하는 베르사유조약과 우리나라의 3·1운동까지 알려지자
학생·노동자 등 전국서 동맹 파업

지난 4일은 중국의 '5·4 운동'이 101주년을 맞는 날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5·4 운동'을 이끈 청년들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부터 매년 이날을 '5·4 청년절'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는데요.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위험을 처음 경고한 의사 리원량(1986~2020)을 포함해 코로나와 싸우다 숨진 청년 33명에게 '제24회 중국 청년 5·4 휘장'을 수여했다고 해요. '중국 청년 5·4 휘장'은 중국 청년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 휘장이지요. 그렇다면 5·4 운동은 무엇이고,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천두슈가 주도한 신문화운동이 발단

5·4운동은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反)제국·반봉건주의 운동입니다. 점차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고 두 달 만에 결국 중국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요.

1911년 청 왕조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고 공화정의 중화민국이 세워집니다. 근대 민주국가가 세워지는 듯했지만, 당시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거꾸로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군주 국가를 세우는 '제제(帝制)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사회적으로는 공자를 숭상하는 복고적인 분위기가 퍼졌지요. 그러자 해외에서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온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중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반봉건적 계몽운동인 '신문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5월 4일 거리시위에 나섰다 구류됐던 베이징사범대 학생들이 7일 학교로 돌아와 찍은 기념사진이에요. 당시 베이징 시내 대학생들이 주도하고 각계각층이 참여한 5·4운동으로 중국 정부는 베르사유조약 조인을 거부했답니다.
1919년 5월 4일 거리시위에 나섰다 구류됐던 베이징사범대 학생들이 7일 학교로 돌아와 찍은 기념사진이에요. 당시 베이징 시내 대학생들이 주도하고 각계각층이 참여한 5·4운동으로 중국 정부는 베르사유조약 조인을 거부했답니다. /위키피디아

신문화운동은 근대 사상가인 천두슈(1879~1942)가 계몽 잡지인 '신청년'을 1915년 창간하면서 시작됐는데요. 천두슈는 '신청년' 창간호에서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청년들에게 '자주적이고 진보적이며 과학적인 청년이 되라'고 했어요. 학문의 자유를 중시했던 베이징대 교장 차이위안페이 덕에 신문화운동은 베이징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어요.

신문화운동은 크게 신사상운동과 신문학운동으로 나눌 수 있어요. 신사상운동은 봉건적 유교 윤리를 타파하고 과학과 민주주의 같은 서구 신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어요. 신문학운동은 예전부터 지식인들이 사용했던 어려운 문어체를 지양하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체인 백화문(白話文) 중심으로 문학작품을 쓰자고 주장하는 운동이었습니다. 특히 백화문은 학생들이 자신의 진보적 주장과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빠르게 퍼졌고 지식이 대중화하는 데 널리 기여했어요.

신문화운동은 점점 지식인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했어요. 특히 천두슈, 후스, 루쉰 등 근대적 교육·사상가들이 주도한 신문화운동 덕에 베이징대에는 과학과 민주주의를 탐구하는 청년들이 많이 모였어요. 이러한 계몽운동을 바탕으로 베이징대는 5·4운동의 진원이 되었지요.

침략자 일본과 무능한 중국 정부에 저항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8월,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지배 중이던 산둥반도의 칭다오를 점령합니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중국 정부에 제출했지요.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조약 중 일부를 승인했어요. 위안스카이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군벌 세력도 1918년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었어요. 중국 내에서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행동과 군사기지 설치 등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차관(借款)을 제공받기로 했죠.

1차 대전이 끝나자 중국은 전후(戰後)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승전국(연합국) 자격으로 대표단을 파견했어요. 중국이 1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거든요. 중국 국민은 그동안 열강에 빼앗겼던 이권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패전국들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승전국들끼리 나눠 가지는 자리가 되고 말았지요. 오히려 전쟁 전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이권은 열강의 승인 아래 일본이 가져갔어요.

이런 결정이 신문에 보도되자 중국인들은 분노했어요. 일본의 요구를 인정해 준 서구 열강과, 외세와 결탁해 주권 침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군벌 세력에 대한 분노였어요.

여기에 우리나라가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인들은 충격을 받았어요. 천두슈는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현실을 비교하며 중국 대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촉구했지요.

그러자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베이징 대학생들이 구국(救國) 시위를 계획합니다. 1919년 5월 4일 3000여 명이 톈안먼에 모여 시위를 시작한 거예요. 그들은 일본과 맺은 21개조 취소, 산둥반도 이권 반환, 매국노 처벌 등을 요구했어요. 중국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체포하며 강경 진압했지요. 그럴수록 베이징 학생들의 투쟁은 치열해졌고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어요. 6월 3일 베이징에서는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더욱 빈번해지면서 학생 1000명 이상이 체포되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학생 시위는 각계각층으로 더욱 확산되었어요. 상해에서는 상인들이 철시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학생들은 휴학으로 뜻을 함께하는 삼파투쟁(三罷鬪爭)이 전개되었어요.

결국 중국 정부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일 행각을 벌인 관리 차오루린 등 3명을 파면했고, 파리에 파견된 중국 대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맺은 베르사유조약에 조인하지 않았죠. 5·4 운동은 학생·상인·노동자 등 각계각층이 참여해 전국적으로 벌인 민주주의 운동이자, 민중의 뜻이 관철된 첫 시위였습니다.

[워싱턴회의서 돌려받은 산둥반도]

베르사유조약 조인을 거부했던 중국은 1921~1922년 미국에서 열린 워싱턴회의를 통해 빼앗겼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돌려받습니다. 워싱턴회의는 1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일본 간 군비 경쟁이 심해지면서 미국 측 제의로 열렸는데요.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 9국이 참여해 산둥반도 반환 등을 논의했지요. 이로 인해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이 한동안 제한받게 돼요.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