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기침 소리에도 연주 멈춘 완벽주의자, 제자들 거장으로 길러

입력 : 2020.05.16 03:00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1920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태어나 19세에 스위스 제네바 콩쿠르 우승
공군 파일럿·의사 등 다양한 활동
무솔리니 독재 비판해 수감 생활도
아카데미 운영하며 학생들 교육… 폴리니·아르헤리치 등 성장 도와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연주자들 역시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굴할 수도 있고, 오히려 본래 실력보다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인물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탈리아의 명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입니다. 그는 5년마다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 피아노 콩쿠르이자,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15년 조성진이 우승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쇼팽 콩쿠르 우승자들의 스승으로 꼽힙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1960년 우승), 마르타 아르헤리치(1965년 우승)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욱 꽃피울 수 있었어요. 스스로도 '완벽주의자'로 유명했던 미켈란젤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탈리아의 명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탈리아의 명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그는 연주자들 개개인의 개성을 살려주는 교육법으로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의 예술 세계를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위키피디아
리스트의 후계자라 불린 미켈란젤리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변호사인 동시에 피아노 연주에도 능했던 아버지에게서 기초를 배운 후 브레시아 음악원을 거쳐 밀라노 음악원에서 공부했죠. 처음에는 바이올린과 오르간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가 피아노로 전공을 바꾼 이유에 대해 그는 "피아노로도 바이올린과 오르간의 음색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탁월한 기교와 능숙한 페달 사용 등을 이용해 원하는 음색을 빚어내 '소리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했죠. 미켈란젤리가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1939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였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프랑스의 전설적인 연주자 알프레드 코르토는 젊은 미켈란젤리를 향해 '진정한 리스트의 후계자'라고 격찬했습니다. 다른 음악가들처럼 그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연주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는데요, 그뿐만이 아니라 무솔리니 정권의 독재와 전체주의를 비판하여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건강 문제로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다 1955년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 및 공식 피아니스트로 선정되며 부활한 미켈란젤리는 이듬해부터 다시 연주자로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1970년대 초부터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 스위스 루가노를 근거지로 삼았고, 심장병이 악화한 상태에서도 연주를 지속하다 1995년 루가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완벽주의 성향 탓에 연주회도 자주 취소

어느 부분을 들어도 약점이 느껴지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기교와 아름답게 다듬어진 음색으로 순도 높은 연주를 뽐냈던 미켈란젤리의 주 레퍼토리는 베토벤·슈베르트·브람스 등 독일 작곡가들과 쇼팽의 주요 작품들, 그리고 드뷔시와 라벨 등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워낙 까다롭고 철두철미한 성격 탓에 세계적 명성을 지닌 피아니스트치고는 남긴 음반이나 녹음이 많지 않은데요, 대신 그가 남겨 놓은 기록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완성도를 지니고 있죠. 미켈란젤리는 연주회를 자주 취소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어요. 청중이 기침을 많이 한다고 중간에 연주를 그만두거나, 연주회장이 너무 덥거나 춥다고 휴식 시간에 연주를 끝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많지 않은 그의 영상물 대부분은 비슷한 카메라 워크를 보이고 있는데요, 자신의 얼굴을 잡는 각도를 스스로 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뛰어난 두뇌를 지녔던 미켈란젤리의 호기심은 피아노 연주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연주 때마다 자신의 피아노와 전속 조율사와 함께 다녔는데, 혼자서도 피아노를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조립할 수 있었다고 하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파일럿으로 참전하기도 했고, 밀라노 음악원 졸업 후에는 잠시 의학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죠. 다재다능을 넘어 기인에 가까운 예술가였다고 하겠습니다.

폴리니·아르헤리치에 음악과 인생 가르쳐

미켈란젤리는 교육가로서 명성도 높습니다. 불과 열여덟 살이던 1938년 볼로냐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일을 처음 시작한 그는 피렌체·토리노 등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제자들을 길러냈어요. 그의 가르침은 다른 피아노 교사들과는 전혀 달랐어요. 남녀의 차이가 있듯 서로 다른 육체적 조건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연주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연주자가 테크닉을 동일한 방법으로 연마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죠. 피아노에서 낼 수 있는 다양한 음색을 다른 악기 소리를 상상하며 만들어내라는 가르침 역시 독특합니다. 또한 미켈란젤리는 학생에 따라 완전히 다른 교육 방법을 보여주었는데요, 명피아니스트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그 좋은 예입니다. 1960년 18세 나이에 쇼팽 콩쿠르에서 충격적인 솜씨로 우승을 차지한 폴리니는 콩쿠르 이후 자신의 예술 세계를 한 단계 높여줄 유일한 인물로 생각되는 미켈란젤리를 찾았고, 미켈란젤리는 폴리니에게 여유 있는 휴식과 함께 새로운 영감을 받아들일 토대를 마련해 주었죠. 비슷한 시기 자신의 진로에 대해 방황하던 아르헤리치를 만난 미켈란젤리는 자신과 그녀가 다른 스타일의 연주자임을 깨닫고 음악을 가르쳐주는 대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찾아 여행하거나 요리를 함께 만드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인생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폴리니의 뒤를 이어 쇼팽 콩쿠르 우승을 차지한 아르헤리치는 훗날 미켈란젤리에게서 단순한 음악 레슨 이상의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고 회상했죠.

주변과 타협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가로서 원칙과 자존심을 지킨 대가 미켈란젤리는 그 개성 있는 행보로 많은 이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긴 인물입니다. 녹음 속에 들어 있는 그의 피아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하고 고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리라 확신합니다.


[미켈란젤리의 '황제' 연주곡엔 실제 천둥 소리가 녹음됐대요]

미켈란젤리의 연주에 하늘도 화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60년 4월 28일, 바티칸에서 열린 음악회에 출연한 미켈란젤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연주했습니다. 3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화려한 마무리를 앞둔 조용한 순간 갑자기 벼락과 천둥 소리가 들려왔어요. 미켈란젤리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멋진 마무리를 해 청중의 갈채를 이끌어냈죠. 이 순간은 녹음으로 남겨져 지금까지 많은 이를 감동케 하고 있습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