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신문은 옳고 그른 것 가르치는 교사"… 퓰리처상으로 기억돼요

입력 : 2020.05.13 03:09

[조셉 퓰리처]

헝가리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 기자로 일하다 31세에 신문사 첫 인수
'황색 언론'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과감한 제목·비판적 기사로 이목 끌어
저널리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1917년 그의 이름 딴 언론상 만들어져

지난 4일 발표된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미국 알래스카의 성폭력 문제와 홍콩 시위, 뉴욕시의 택시면허 거품 붕괴 등을 다룬 보도와 사진들이 선정됐어요. 본래 퓰리처상 수상작은 매년 4월 발표되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발표가 다소 늦어졌어요. 퓰리처상은 '언론계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의 언론인 조셉 퓰리처(1847~1911)의 이름을 따서 1917년 만들어졌어요. 퓰리처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의 이름을 딴 상까지 만들어진 걸까요?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된 퓰리처

헝가리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퓰리처는 가정교사들에게 프랑스어·독일어 등을 배우며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고, 가족들은 가난해졌습니다. 방황하던 그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 군인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일곱 살 나이에 미국으로 떠나 270일간 군 복무를 했어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었어요. 그는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마부·선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어요. 그 와중에도 틈틈이 도서관에 들러 영어를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었어요. 또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류한 덕분에 독일어로 발행되던 신문인 '베스틀리헤포스트'의 기자로 일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정부의 부정부패를 날카로운 펜으로 비판하며 인지도를 높여갔어요.
‘언론계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의 언론인 조셉 퓰리처의 사진. 헝가리 출신 퓰리처는 미국에 건너온 뒤 불과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되며 본격적인 언론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진부한 기사 제목에서 탈피하고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갖춘 신문을 만들어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언론계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의 언론인 조셉 퓰리처의 사진. 헝가리 출신 퓰리처는 미국에 건너온 뒤 불과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되며 본격적인 언론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진부한 기사 제목에서 탈피하고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갖춘 신문을 만들어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위키피디아
그러던 어느 날 퓰리처는 세인트루이스의 석간신문인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가 운영난에 시달리다 파산해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는 재빠르게 이를 인수하였고 다른 석간신문과 합병하여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앤드 디스패치'를 출범시켰어요. 남다른 열정과 능력 덕분에 불과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된 것이죠.

시어도어 루스벨트와의 대결에서도 승리

퓰리처는 정치에 대한 야망도 큰 사람이었어요. 잠시 공화당원으로 있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이후 계속 민주당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민주당이 백악관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뉴욕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은 뉴욕의 신문사를 소유하고 싶다는 꿈으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마침내 1883년 퓰리처는 금융업자 제이 굴드에게서 34만6000달러에 뉴욕 신문사 '뉴욕 월드'를 인수해 '월드'라고 이름을 바꿔 발행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많은 빚을 지고 시작했지만, 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덕분에 단기간에 경영을 정상화할 수 있었어요.

진부한 1면 머리기사 제목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였고 '자신감 가지고 써라. 일상적 단어를 활용한 짧고 인상적인 문장으로 써라' 등 일명 퓰리처 공식이라 불리는 기사 작성 원칙을 세워서 독자를 사로잡았죠.

그 덕분에 '월드'는 1880년대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었고, 퓰리처는 가장 부유한 미국인 50명 안에 들어가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쓰는 사설 하나에 정치인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정도였어요. 특히 당시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의 대결은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어요. 퓰리처는 평소 루스벨트의 노동계급에 대한 인식, 전쟁관 등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게재하였어요. 특히 대통령 임기 말에 있었던 파나마 운하 건설과 관련한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신문에 싣자 루스벨트는 그를 기소하였어요. 하지만 1911년 1월 3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월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는 퓰리처가 평생 원칙으로 삼았던 '언론의 정치적 독립성'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어요.

선정적인 '황색 언론'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붙어

하지만 퓰리처에게는 '황색 언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어요. 이는 1895년 미국의 신문 경영자 윌리엄 허스트가 창간한 '뉴욕 저널'과의 경쟁에서 유래했어요. '월드'에는 노란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 일명 '노란 아이(yellow kid)' 만평이 있었는데, 허스트는 이 만평에 큰 관심을 가졌고 결국 작가를 꼬드겨 '뉴욕 저널'로 데려갔어요. 이를 계기로 '월드'와 '뉴욕 저널'이 진흙탕 싸움을 벌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경쟁에 '황색 언론'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월드'를 비롯한 미국의 신문사들이 미국 정부가 스페인과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선정적인 기사를 내보낸 것은 '황색 언론'의 단면을 잘 보여주지요.

어릴 적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던 퓰리처는 밤늦게까지 신문을 읽는 습관 때문에 시력이 더욱 안 좋아졌고 결국 40세 때 실명했어요. 하지만 그는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라는 신념을 가지고 19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는 언론인은 지식을 다루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변호사나 의사처럼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널리즘으로 유명한 컬럼비아 대학에 20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어요. 그중 일부는 훌륭한 기사를 써서 언론의 품격을 높인 기자나 저술가를 위한 상을 제정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퓰리처상이 제정되었고, 지금은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 권위의 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