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식탁 위 경제사] 단돈 1페니의 커피와 자유로운 대화, 근대를 만들어내다

입력 : 2020.05.08 03:09

[커피하우스]

17세기 영국의 지식 공유 장소
사회적 지위나 재산에 관계 없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 몰려 들어
'국부론' '만유인력' 완성에도 기여
이후 프랑스 파리서도 인기 끌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찾아

'중국의 스타벅스'로 불리던 '루이싱(瑞幸) 커피'가 최근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 기업은 다른 커피 브랜드와 경쟁하기 위해 무료 쿠폰, 할인 쿠폰 등을 남발했고, 이로 인한 손실을 감추기 위해 매출을 부풀린 혐의를 받고 있어요. 사건 전까지 루이싱 커피는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2017년 창립해 중국 전역에 2000여 개가 넘는 매장을 열었고, 미국 나스닥에도 상장됐어요.

'차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루이싱 등의 신흥 커피 기업들이 쏟아지는 걸 보면 현대인의 커피 사랑은 대단한 듯합니다. 커피는 석유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원자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비량이 엄청납니다. 국제공정무역기구는 매일 전 세계적으로 20억 잔의 커피가 소비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커피는 어떻게 세계로 퍼져 나갔을까요?

'이슬람의 와인'으로 불렸던 커피

커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프리카 북동부에 있던 아비시니아 제국(현재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한 염소 지기가 염소들을 고지대에 풀어놓고 놀게 했는데, 어느 날 유난히 염소들이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가보니 빨간 열매를 먹고 활기차게 뛰는 모습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염소들은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해요. 이 빨간 열매의 정체가 바로 커피였지요.

아프리카에서 자라던 커피를 세계로 퍼뜨리는 데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한 곳은 바로 이슬람 제국이었습니다. 커피는 이미 9세기경부터 이슬람 수도자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아랍 지역으로 전파돼 재배됐어요. 이슬람 제국은 율법에 따라 술을 엄격하게 규제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기 위해 커피를 즐겨 마시게 됐습니다. 커피를 '이슬람의 와인'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1페니로 세상을 배우는 '커피하우스'

이후 커피는 후추와 같은 향신료 무역을 통해 서양으로 들어갔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처음에는 커피를 '악마의 검은 물'이라며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커피를 가장 발 빠르게 받아들인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1650년 옥스퍼드 대학가에 생기기 시작했던 커피 하우스는 금세 런던 등의 대도시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17세기 초 런던에만 1000여 개의 커피하우스가 생겼고, 이어 영국 전체에 8000여 개로 늘었다고 합니다.
17세기 영국 런던의 커피하우스를 묘사한 역사화. 당시 유럽에서 산업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된 영국은 런던 곳곳에 지식인들이 정보를 교류하는 커피하우스가 생겨났어요. 커피 한 잔 값이면 다양한 사람과 토론은 물론, 신문이나 관보도 읽을 수 있어 근대 서구사회의 지성이 발달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7세기 영국 런던의 커피하우스를 묘사한 역사화. 당시 유럽에서 산업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된 영국은 런던 곳곳에 지식인들이 정보를 교류하는 커피하우스가 생겨났어요. 커피 한 잔 값이면 다양한 사람과 토론은 물론, 신문이나 관보도 읽을 수 있어 근대 서구사회의 지성이 발달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위키피디아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 산업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기술 발달과 함께 중간계급의 등장 같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습니다. 커피하우스는 이런 욕구를 수용하는 광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커피하우스에는 해운업자, 무역업자, 금융가, 변호사, 정치가, 예술인 등 온갖 사람이 출입했습니다. 인쇄 문화가 아직 발전하지 않아 당시 구하기 어려운 신문과 관보도 얼마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커피하우스를 사람들은 커피 값 1~2페니(영국 돈의 최소 단위)만 있으면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며 '페니 대학'으로 불렀습니다. 이곳에서 사회적 지위나 재산의 많고 적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놀라운 성과가 쏟아졌습니다. 영국 노동당과 보수당의 원조인 '토리당'과 '휘그당'이 커피 하우스에서 태동했습니다. 토리당은 런던의 '오진다 커피하우스', 휘그당은 그 인근에 있던 '세인트 제임스 커피하우스'에서 모였던 정치인들로부터 시작됐지요. 영국의 보험 협회인 '런던 로이즈'는 항구 근처에 1688년 문을 연 '로이즈 커피하우스'에 모인 해운업·금융업 종사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 역시 커피하우스에서 가다듬어졌습니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인기

커피하우스의 인기는 영국을 넘어 프랑스로 이어집니다. 1689년 프랑스 파리에 문을 연 커피하우스 '프로코프'에는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사상가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훗날 프랑스대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됐던 계몽주의를 완성합니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진보를 믿으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낡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상이었죠. 커피는 이처럼 서구 자본주의의 출발점인 대항해시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경제력에 견줘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정치·사회·과학적 담론을 보충해주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몸집이 커진 청소년이 지성을 갖추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무심코 커피를 마십니다. 그러나 커피 한잔에는 인류의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합니다.



권은중 '음식 경제사' 저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