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15년간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 단번에 해결한 '감자 대왕'

입력 : 2020.05.06 03:00

[프리드리히 2세]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3대 국왕
동유럽 '슐레지엔' 지역 차지하려 오스트리아와 대규모 전쟁치러
1763년 승리했지만 국토는 황폐화

아메리카 대륙 신작물이었던 감자 적극적으로 보급하며 식량난 개선

벨기에는 세계 최대 감자 수출국입니다. 그런데 최근 해외 언론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로 감자 소비가 줄고, 수출 판로도 막혀 감자 75만t이 쌓여 있다고 해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벨기에 감자산업조합에서는 '매주 2회 이상 감자튀김 먹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어요. 18세기 독일 땅에 있던 프로이센 왕국에서도 기근의 해결책으로 감자 소비를 적극적으로 독려한 적이 있습니다. '감자 대왕'으로 불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6) 치세에 있었던 일이죠. 당시 프로이센은 어떤 상황이었기에 감자 소비를 장려한 것일까요?

8년간 치러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01년 독일 북부 지역에 세워진 프로이센 왕국은 제2대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대규모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발돋움합니다. 그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더욱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영토 확장에 집중합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가 탐냈던 땅이 있는데요, 폴란드와 체코에 걸쳐 있는 '슐레지엔' 지역입니다. 슐레지엔은 석탄·철·납 등 광석이 풍부해 역사상 지배권 분쟁이 잦았던 지역이에요. 당시 슐레지엔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어요.

농민들의 감자 수확을 둘러보는 프리드리히 2세의 모습.
농민들의 감자 수확을 둘러보는 프리드리히 2세의 모습. 독일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로베르트 바르트뮐러의 그림입니다. 여러 차례의 큰 전쟁과 대흉년을 겪은 뒤 국토가 황폐화되자,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아메리카 대륙의 신작물이었던 감자를 적극적으로 보급했어요. /위키피디아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했던 174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도 카를 6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장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유럽 왕가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을 근거로 바이에른, 에스파냐, 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이 그녀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며 간섭하기 시작해요. 이 틈을 타 프로이센도 '슐레지엔을 넘겨준다면 왕위 계승을 인정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을 일으켰지요. 8년간의 전쟁 끝에 독일 라인강 하류에 있는 아헨에서 '아헨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어요.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지배권은 인정됐지만,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넘기게 됩니다.

슐레지엔 갈등으로 벌어진'7년 전쟁'

슐레지엔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는 이를 갈며 군비를 증강해요.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랑스와 동맹도 불사했고,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포위하려 합니다. 이를 눈치채고 영국과 손잡은 프로이센의 선제공격으로 7년 전쟁(1756~1763)이 시작됐어요. 프로이센군은 군대 규모에서 오스트리아 동맹군에 밀렸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전면전 대신 안개와 지형을 이용한 기습전을 펼치면서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해요. 1757년 11월 프로이센군은 작센 지방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군에 대승을 거뒀고, 12월에는 슐레지엔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합니다. 또 1762년 러시아에서 갑작스럽게 여제 엘리자베타가 서거하고 프리드리히를 숭배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합니다. 표트르 3세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끊고 프로이센 편을 들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763년 프로이센과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을 맺으며 완전히 슐레지엔을 포기했어요. 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의 결과, 프로이센은 유럽의 신(新)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어요.

왕이 직접 감자 재배하며 부정적 인식 바꿔

전쟁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장기간의 전쟁으로 프로이센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특히 1774년엔 대흉년까지 겹치며 백성의 삶은 곤궁해졌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남은 재위 기간 동안 7년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어요. 당시 유럽은 16세기부터 아메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감자·콩·옥수수와 같은 신작물을 들여오고 있었어요. 그는 감자라는 식물이 빵의 대체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영양분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짧은 기간에 대량 수확이 가능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당시 유럽 사람들은 생김새 때문에 '성경에 나오지 않은 악마의 식물'이라며 신작물 중 유독 감자를 배척했어요. 오늘날의 개량된 감자와는 다르게 거무스름하고 울퉁불퉁한 모양에 자르면 쉽게 변색하였기 때문이에요. 감자를 먹으면 한센병에 걸린다는 괴소문까지 돌아 사람들은 감자를 더욱 부정적으로 생각했어요. 이 때문에 감자는 주로 가축 사료로 사용됐어요.

그래서 프리드리히 2세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방책을 생각해 냅니다. 그는 '감자는 귀족만 먹어야 한다'고 공지했어요. 또한 자신의 정원에서 직접 감자를 재배하고 경비원을 세워 삼엄하게 감시했어요. 처음에 감자 먹기를 거부하던 사람들은 곧 '감자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작물'이라고 인식했고, 왕의 정원에 있던 감자를 몰래 훔쳐서 기르는 상황까지 벌어졌지요. 이후 감자는 점차 프로이센과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고, 오늘날까지 독일인의 주요한 식재료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 대왕'이란 별명을 얻게 됐어요. 독일 상수시 궁전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의 묘비에는 지금도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꽃과 함께 감자를 두고 간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