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병갑 몰아낸 동학군… 폭정 계속되자 두 달 뒤 다시 모여

입력 : 2020.05.05 03:00

[고창 무장 봉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1894년 1월 '고부 민란' 일어났어요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에 전봉준 등 '나라 망해가는 꼴 볼 수 없다' 선언
호남 각지에 통문 보내 참여 독려 본격적인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동학농민운동 당시 '고창 무장 봉기'가 올해부터는 모든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리게 됐어요. 1894년 전북 고창군 무장면(당시 무장현)에서 일어난 이 봉기에 대해 "고부 봉기에 실패한 전봉준이 손화중과 힘을 합쳐 고창 무장에서 일으킨 대규모 농민 봉기"라고 설명해요. 고창 무장 봉기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요?

조병갑 군수의 횡포로 시작된 고부 민란

1800년 조선의 부흥을 위해 애쓰던 22대 왕 정조가 승하한 뒤, 외척 등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잡고 전횡하는 세도정치가 60여 년간 이어져요.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자, 지방 관리들은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며 백성을 못살게 굴었지요.

[뉴스 속의 한국사] 조병갑 몰아낸 동학군… 폭정 계속되자 두 달 뒤 다시 모여
/그림=김영석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외척의 세도정치는 사라졌어요. 그러나 관리들은 여전히 온갖 구실로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며 농민들을 괴롭혔어요. 그러던 중 1894년 1월(음력)에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고부 민란 또는 고부 농민 봉기라고 부르고,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으로 봐요.

고창에서 다시 한 번 봉기 준비한 전봉준

조병갑이 물러난 이후 조정에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정부에서 파견한 임시 관리)로 이용태를 파견하였어요. 그러나 이용태는 사건을 일으킨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며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지요. 동학은 1860년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가 민간신앙과 불교, 도교를 융합해 만든 새로운 종교였어요.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탄압한 것은 사건에 앞장선 인물 중에 동학의 지도자급인 전봉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부 민란 이후 전봉준과 그를 따르던 동학교도들은 인근 고창군 무장현으로 피신해 있었어요. 그러다 이용태의 횡포가 심해지자 전봉준은 농민들을 이끌고 다시 봉기하게 됩니다.

지역 민란에서 벗어나 새 세상 꿈꿔

1894년 3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봉기를 선언하였어요. 이를 '고창 무장 봉기'라고 해요. 무장에서 승기를 잡은 농민군은 호남 각지에 사발통문을 보내 농민들의 참여를 독려했어요. 이후 전라도 지역을 휩쓸며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어요. 지역 민란에 그치지 않고 중앙정부의 권세가와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고 새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라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르게 됐지요.

이후 조정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 군대를 조선으로 끌어들였고, 전주 완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농민군은 해산하였어요. 그러나 조선을 지배할 욕심을 품었던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더니, 조선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켰어요. 동학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일어섰지만, 공주 우금치, 논산 황하대 전투 등에서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크게 패했어요. 이후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돼 처형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녹두장군'이라 불렸던 전봉준… 몸집 작아 별명이 녹두였대요]

전봉준은 1855년 전라도 고부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몸이 왜소해 녹두콩만 하다는 뜻으로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이 때문에 훗날 '녹두장군'으로 불리게 돼요. 전봉준은 아버지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저항하다 곤장을 맞고 숨진 뒤 사회 개혁의 뜻을 품게 됐어요. 농사와 훈장 일을 하며 생계를 잇던 전봉준은 35세 무렵 동학에 입교했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포교 책임자로 임명돼요. 고부 민란이 동학농민운동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앞장서서 농민군을 이끌었던 그는 과거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일본군에 넘겨졌고, 1895년 교수형에 처해져 40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