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47개 현과 7개 페달의 울림…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됐죠

입력 : 2020.05.02 03:00

[하프]
각형·아이리시·웨일스 하프 등 거쳐 음정 조절 가능한 페달 하프로 발전

19세기부터 교향곡에도 등장
스페인 연주자 자발레타 활약으로 명실상부한 독주 악기로 자리잡아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가면 어떤 악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나요? 바이올린 등 현악기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긴 하지만, 외관이 아름답기로는 하프가 최고인 것 같아요. 한구석에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아름다운 음향이 울려 퍼지는 듯 느껴지는 악기입니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유재석이 '유르페우스'라는 예명으로 실제 클래식 음악회에서 하프를 연주해 화제를 낳기도 했죠.

활에서 출발한 악기, 하프

최초의 하프는 사냥꾼의 활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어요. 활의 줄을 튕길 때 소리가 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악기로 발전한 것인데, 기원전 3000년쯤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니 정말 오래됐죠. 이집트 지역에서 처음 시작된 하프는 활 모양으로 시작해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각형 하프'로 변했고, 로마 제국의 행렬이나 종교적 행사 등에서 널리 쓰였어요. 하프는 그리스 지방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는데, 철학자 플라톤이 악기의 음색이 지나치게 몽환적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죠. 그리스에서는 하프 대신 조금 작은 악기인 리라를 주로 연주했어요.

미국의 초상화 화가 토머스 설리의 작품 '하프를 연주하는 숙녀'(1818).
미국의 초상화 화가 토머스 설리의 작품 '하프를 연주하는 숙녀'(1818). 최근 오케스트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페달 하프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프는 몽환적인 음색 때문에 환상이나 꿈의 세계, 신이나 천사 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위키피디아
서유럽에서 하프를 연주하게 된 것은 7세기 이후라고 하는데요, 당시까지 하프는 한 쪽이 뚫려있는 형태였지만 중세 이후에는 연주자에게 먼 쪽에 '기둥(pillar)'이 있는 모양이 등장합니다.

이후 한 손으로 연주하는 '아이리시 하프', 이보다 더 크고, 음유 시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웨일스 하프' 등을 거쳐 우리가 아는 현재의 하프로 천천히 개량되었죠. 47개의 현을 가진 지금의 하프는 흔히 '페달 하프'라고 하는데, 페달 하프에는 모두 일곱 개의 페달이 달렸는데 페달은 두 단계로 누를 수 있습니다. 한 번 누르면 반음이 내려가고, 한 번 더 누르면 원래대로 반음이 올라가게 조절됩니다.

'환상교향곡'의 꿈속 세상을 표현한 하프

하프 소리를 들으면 현실 세계가 아닌 꿈나라를 떠다니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인지 오케스트라나 실내악에서 하프는 환상이나 꿈의 세계를 표현하거나, 신이나 천사 등을 그릴 때 자주 등장합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에 하프의 소리가 선명히 울린 첫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가 작곡한 '환상교향곡'입니다. 표제 음악, 즉 제목을 붙여 어떤 특정한 주제나 대상을 표현하는 음악의 선구적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이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의 자전적 얘기를 음악으로 그리고 있어요.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남자 주인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약을 먹었으나 죽음에 이르지 못한 채 꿈과 환상을 오간다는 줄거리죠. 전체 5악장 중 2악장의 제목은 '무도회'인데요, 주인공의 꿈속에 펼쳐지는 우아한 왈츠 속에서 하프의 몽환적인 음색이 두드러집니다.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1840~1893)의 유명한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등에서도 하프 독주를 들을 수 있어요. 두 곡 모두 하프 주자가 카덴차(독주로 화려하게 기교를 선보이는 부분)로 연주하는 부분에서 곡이 지닌 동화적인 매력이 짙어집니다. 또 독일 작곡가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에서는 무려 6대의 하프가 등장하는데요. 마지막 장면인 '발할 성으로 향하는 신들의 입장'에서 하프가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전해줍니다.

하프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경쟁하던 악기 회사들 덕에 만들어진 걸작도 있습니다. 1904년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1862~1918)는 당시 유명 악기사였던 플레옐사에서 새롭게 개발한 하프를 위해 '신성한 춤곡과 세속적 춤곡'을 만들었어요. 경쟁 관계에 있던 에라르사는 1년 뒤 드뷔시와 쌍벽을 이루던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에게 비슷한 편성의 작품을 부탁했고, 불과 8일 만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서주와 알레그로'가 발표되었습니다. 서주는 악곡의 주요 부분 앞에 붙어 있는 비교적 짧은 곡이고 알레그로는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하는 곡이라는 뜻입니다.

하프를 독주 악기로 자리 잡게 한 자발레타

쉽게 구경하기도 어렵고 연주하기도 까다로운 하프가 애호가들에게 친숙해지기까지 훌륭한 연주자들의 공이 컸습니다. 스페인의 니카노르 자발레타(1907~1993)는 하프가 독주 악기로 자리 잡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죠. 시대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레퍼토리로 평생 3000회가 넘는 연주회를 가졌고, 그의 음반은 총 300만장이 넘게 팔렸습니다.

파리 음악원의 교수였으며 20세기 중반 다수의 음반을 녹음했던 릴리 라스킨(1893~1988), 다양한 실내악 활동을 했던 여성 연주자 우르슐라 홀리거(1937~2014) 등은 오래도록 남을 하프의 명인들이죠. 25세에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어 10년간 활동했고 그 후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47), 파리 국립 오페라를 거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수석 주자로 활약하는 에마뉘엘 세송(36) 등은 하프계의 현역 스타들입니다. 화려함과 우아함, 세련미를 모두 갖춘 하프 음악에 한 번쯤 빠져 보시기 바랍니다.


[모차르트도 하프 연주곡 작곡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하프를 위한 걸작은 수없이 많지만,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 한 곡을 선택하자면 모차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C장조 K299'를 들고 싶습니다. 이 곡은 1778년 4월 모차르트와 그의 어머니가 파리에 머물 당시 만들어졌는데요, 독일 베를린과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대사를 지냈던 드 기느 백작의 주문으로 작곡되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당시 드 기느 백작의 딸에게 작곡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플루트 연주를 잘하는 백작과 딸의 하프 연주를 위해 특별한 편성의 협주곡을 완성했어요. 전반적으로 우아하고 달콤한 느낌이 나며, 특히 2악장이 많은 인기가 있어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