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두 번이나 왕이 될 기회 있었지만… 곤룡포를 입진 못했죠

입력 : 2020.04.21 03:00

[월산대군]
아버지 죽음 이후 어린 나이 탓에 삼촌 예종에게 세자 자리 밀려
당대 최고 권력가 한명회 사위였던 동생이 그를 제치고 성종으로 즉위
시 지으며 살다 35세에 세상 떠나 인품 훌륭해 후세에 모범 되기도

조선의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에요. 최근 문화재청에서 대한문의 제 모습을 되찾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대한문의 월대를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어요. 월대는 주요 건물 앞에 평지보다 한 층 높게 기단 형식으로 대(臺)를 쌓은 것인데, 건물의 위엄을 높이는 역할을 했어요. 덕수궁은 두 번이나 왕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던 왕자. 바로 월산대군이 살던 집터에 지어진 궁궐입니다.

삼촌 예종에게 세자 자리 내준 월산군

조선의 6대 왕 단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1453년,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어요. 그리고 1455년에는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올라 조선 제7대 왕 세조가 되었지요. 세조가 왕이 되자 18세 맏아들 도원군이 세자로 책봉돼 의경세자가 되었고요.

[뉴스 속의 한국사] 두 번이나 왕이 될 기회 있었지만… 곤룡포를 입진 못했죠
/그림=김영석
의경세자는 수빈 한씨 사이에서 아들 정과 혈, 딸 경근을 낳아요. 정은 월산군, 혈은 자산군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경세자가 자산군이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돼 질병으로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고 말아요. 그런데 세조는 당시 너무 어렸던 손자 월산군 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세자로 삼았어요. 그리고 궁궐을 떠나야만 했던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궁궐 밖에 특별히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집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 터가 된 곳이에요.

한명회 사위인 동생이 9대 성종으로 즉위

1468년 세조가 죽음을 맞자 뒤를 이어 해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의 제8대 왕 예종이에요. 그러나 예종도 형이었던 의경세자처럼 불과 스무 살, 왕이 된 지 13개월 만에 죽고 말지요. 예종은 첫 번째 부인으로 한명회의 딸인 한씨를 맞이했으나, 한씨는 첫 원자를 출산하고 사망했으며 원자마저 얼마 뒤에 죽고 말았어요.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에게서 제안대군을 낳았지만, 당시 너무 어리고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자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던 자성왕태비, 즉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가 "자산군이 기상과 도량이 특별하고 학문이 날로 발전하므로 능히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하면서 월산군의 동생인 자산군이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이 되었어요. 예종의 원자였던 제안대군이나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었던 16세 월산군을 제치고 당시 13세였던 자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의 영향 때문으로 짐작해요. 예종처럼 자산군도 부인이 한명회의 딸이었거든요. 자산군은 즉위한 뒤 아버지 의경세자에게 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형 월산군의 칭호를 월산대군으로 높여 주었어요.

자연과 시를 벗 삼으며 살아

월산대군은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지으며 조용히 살다가 35세로 병들어 죽었어요. 왕이 될 기회를 삼촌에 이어 동생에게 두 번이나 뺏긴 셈이지만, 동생인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고 인품과 학문도 훌륭하여 종친의 모범이 되었기에 후세의 왕들에게도 좋은 예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장이 뛰어나 중국까지 알려졌다고 해요.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들이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라는 시조가 널리 알려져 있죠.


[월산대군이 살았던 집은 덕수궁 자리에 있었어요]

덕수궁은 월산대군 집터에 지어졌어요.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란 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왔을 때 궁궐이 모두 불에 타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합쳐서 임시 행궁으로 삼았어요. 그 뒤 광해군이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인조반정 후 인조는 경운궁을 월산대군 가문에 돌려줬어요.

그러다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된 뒤 암살 위협을 피해 1896년 2월부터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1897년 초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다시 궁궐이 됩니다. 조선 왕궁의 유일한 석조 건물인 석조전도 그때 세워졌어요. 경운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뒤에는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