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하나의 주제로… 베토벤, 슈베르트 등 50명이 만든 곡 모았죠
입력 : 2020.04.18 03:00
[디아벨리 변주곡]
1819년 당대 유명한 음악가들이 안톤 디아벨리의 왈츠 주제에 맞춰 각자 작곡해 5년 만에 하나의 곡 완성
1837년 '헥사메론'도 같은 방식으로 리스트·체르니·쇼팽 등 6명이 변주곡 만들어 완성했죠
지난달 28일은 2015년 독일의 음악가 닐스 프람이 제안한 '세계 피아노의 날'이었어요. 피아노 건반이 여든여덟 개인 것에 착안해, 새해가 시작한 후 여든여덟째 날로 그 기념일을 정했다고 하네요. 이날 독일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에선 세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집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전 세계에 공개했습니다. 예브게니 키신, 조성진, 다닐 트리포노프 등 현재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연주자들이 참여했으며, 이 중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는 최근 앨범으로 발표한 베토벤(1770~1827)의 '디아벨리 변주곡' 중 일부를 연주했어요. 이 디아벨리 변주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베토벤의 변주곡이며 뒷부분은 슈베르트 등 다른 음악가들의 변주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음악가라면 고독하게 작곡에 매달리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음악사에는 이처럼 여러 음악가가 함께 힘을 합쳐 만들어낸 작품도 여럿 있습니다.
◇음악가 50명이 작곡한 디아벨리 변주곡
작곡에서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기법을 '변주'라고 하며, 주제와 몇 개의 변주로 이뤄진 곡을 '변주곡'이라고 합니다. 익숙한 주선율이 나온 뒤, 이 선율을 조금씩 비튼 변주가 이어지는 '캐논 변주곡'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지요.
◇음악가 50명이 작곡한 디아벨리 변주곡
작곡에서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기법을 '변주'라고 하며, 주제와 몇 개의 변주로 이뤄진 곡을 '변주곡'이라고 합니다. 익숙한 주선율이 나온 뒤, 이 선율을 조금씩 비튼 변주가 이어지는 '캐논 변주곡'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지요.
- ▲ 요제프 단하우저가 그린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 피아노 앞에 앉은 리스트 주위에 여러 음악가와 작가가 있는 이 그림은 '헥사메론'의 음반 표지로도 쓰였습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협업한 '디아벨리' '헥사메론' 작곡에 모두 참여했습니다. /위키피디아
부흐빈더가 내놓은 '디아벨리 변주곡' 앨범은 21세기판 디아벨리 변주곡 프로젝트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활동 중인 작곡가들이 디아벨리의 주제에 맞춰 새롭게 작곡한 변주들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죠. 로디온 셰드린, 레라 아우어바흐, 브렛 딘, 막스 리히터, 탄 둔 등 현존하는 최고 작곡가들이 참여했죠. 이 변주들은 각 작곡가의 독자적인 색채와 분위기가 담긴 동시에 피아노의 음향과 기능을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본 걸작들입니다. 과거에도 그랬듯, 현재에도 명음악가들이 함께 힘을 합쳐 풍성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게 무척 흥미롭습니다.
◇공주가 작곡가 6명 모아 만든 '헥사메론'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후 10년이 지난 1837년, 디아벨리 변주곡과 비슷하게 협업 형태로 만들어진 변주곡이 또 하나 발표됐습니다. '헥사메론'이란 이름의 변주곡은 당시 파리에 망명 중이던 이탈리아의 공주 크리스티나 벨조요소(1808~1871)가 리스트를 설득해 기획한 작품이죠. '헥사메론'은 성경에서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는 여섯 날을 의미합니다. 벨조요소 공주는 리스트를 포함해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들에게 각기 한 곡씩의 변주를 만들도록 부탁해 멋진 음악회를 기획했어요. 여러 사정으로 음악회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리스트는 자신의 음악 동료들과 25분짜리 대곡을 완성했습니다.
리스트와 함께 변주곡에 참여한 음악가들은 카를 체르니(1791~1857), 지기스몬트 탈베르크(1812~1871), 요한 페터 픽시스(1788~1874), 앙리 헤르츠(1803~1888),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 등 여섯 명이었어요. 리더 역할을 맡은 리스트가 주제와 2변주, 피날레 부분을 작곡했고, 1변주는 탈베르크, 3변주는 픽시스, 4변주는 헤르츠, 5변주는 체르니, 6변주는 쇼팽이 만들었습니다. 모두 작곡과 연주에 능했기 때문에 화려함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웅장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죠.
'헥사메론' 변주곡의 주제는 벨조요소 공주가 직접 골랐어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1801~1835)의 오페라 '청교도' 2막에 나오는 행진곡 '나팔소리가 들리고'였습니다. 당시 공주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 행진곡의 힘찬 악상으로 이탈리아에 응원을 보낸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죠. 벨리니가 만든 주제까지 합하면 이 곡은 모두 일곱 작곡가가 힘을 모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헥사메론'은 2009년 다시 한 번 생명을 얻었습니다. 당시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여섯 사람이 모여 벨리니의 주제로 또 다른 여섯 개의 변주곡을 만든 것이죠. 직접 연주를 맡은 매슈 캐머런을 비롯한 젊은 작곡가 중에는 한국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며 교수로도 활동하는 퀜틴 김 등의 이름도 보입니다. 각자 개성을 살린 독특한 변주들이 인상적이죠.
[세계 곳곳의 대가들, 영상편집 통해 한 곳에서 협주한 것처럼 만들었죠]
최근엔 음악가들이 현대 기술을 활용해 서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협업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이 지난 4일 소개한 동영상에는 3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라베크 자매(피아노), 제임스 에네스·르노 카퓌송(바이올린), 요요 마·에드가르 모로(첼로), 안드레아스 오텐자머(클라리넷) 등이 연주한 곡은 카미유 생상스 작곡의 '동물의 사육제' 중 피날레였습니다. 각자의 집이나 스튜디오에서 연주한 것을 한데 모아 편집한 이 영상을 만들기 위해, 연주자들은 헤드폰을 쓰고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거나 메트로놈(박자기)에 맞춰 각자의 파트를 연주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