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유겸의 스포츠로 세상 읽기] 다음 세트 위해 일부러 패배 … 테니스 황제 페더러도 가끔 사용해요

입력 : 2020.04.14 03:00

탱킹(Tanking)

테니스 경기에서 한 선수가 첫 세트에서 0-5로 지고 있어요. 6번째 게임은 상대방이 먼저 서브를 넣는 서비스 게임입니다. 여기서 이겨봐야 점수는 1-5입니다. 상대방 서비스 게임을 최소한 2개나 더 이겨야 하죠. 이 세트를 이길 가능성은 그야말로 0에 가까워 보입니다. 차라리 6번째 게임을 일부러 지는 것이 다음 세트에서 이기기 위한 더 효과적인 전술이 아닐까요?

실제로 지난 2016년 US오픈 준결승에서 프랑스 선수 가엘 몽피스(34)라는 선수가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33)를 상대로 첫 세트에서 5게임을 내리 내주자, 6번째 게임은 아예 포기해 버렸어요. 누가 봐도 성의 없게 코트에서 걸어 다녔고, 공을 높이 띄워 내보내 버렸죠. 그런데 힘을 아낀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다음 세트부터는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주며 3게임을 따내는 등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었던 세계 랭킹 1위 최강자 조코비치를 상대로 접전을 펼칩니다. 결국, 지긴 했지만요.

'테니스 황제'로 불리는 로저 페더러.
'테니스 황제'로 불리는 로저 페더러. 스포츠 경기에서 다음 세트를 이기기 위해 일부러 이번 세트를 포기하거나 점수를 내주는 것을 '탱킹'이라고 하는데, 페더러 역시 가끔 탱킹 전술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
이처럼 스포츠 경기에서 일부 세트를 포기하거나, 점수를 내주는 것을 탱킹(Tanking)이라고 합니다.'tank'는 보통 '탱크'라는 명사로 쓰이지만, 동사로 쓰일 땐 '(시합에서) 일부러 지다, 포기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테니스나 배구처럼 점수나 게임 수를 모두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세트를 먼저 따내면 승리하는 스포츠에선 때론 일부러 져주는 탱킹을 이기기 위한 전술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프로 선수지만 사람의 집중력과 체력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39)도 가끔 탱킹 전술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탱킹 전술이 정말 효과적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습니다. 힘을 아끼려고 살살 했다가 진짜로 힘이 빠져버리거나, 한번 잃어버린 리듬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특히 아마추어 선수는 경기력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일부러 포인트를 내주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정신력이 무너져 쉽게 경기를 포기하게 되기도 하죠.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스포츠는 이기는 것이 목적이긴 하지만, 승리가 의미 있다고 느낄 만한 것이어야 비로소 가치가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승리하느냐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고요. 힘을 좀 아끼는 전술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승리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스포츠의 미덕을 외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조코비치와 페더러 못지않은 테니스의 정상급 선수 라파엘 나달(34)은 상대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모든 게임에서 공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무려 4시간이 넘는 경기에서도 단 한 번도 성의 없이 공을 친 적이 없어 많은 팬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죠. 지난 1월 헬기 사고로 안타깝게 사망한 미국 농구선수 코비 브라이언트는 지난 2012년 남들 다 몸 사리며 살살 뛰는 올스타 경기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상대 선수와 부딪혀 코뼈가 부러지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경기를 마쳤고, 다음 경기에도 출전했죠. 나달과 코비의 경기가 유달리 팬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뛰어난 성적 덕이 아니라, 바로 이런 순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