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세계 최대 아동도서전 수상작들, 그림만 봐도 상상 펼쳐지죠
입력 : 2020.04.11 03:00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展]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서 수상한 동화·그림책의 원화들 300여점 전시
물감 없이 연필 선으로만 그리거나 디지털 펜과 붓으로 표현한 방법의 다양한 작품들 상상력을 자극시켜
최근 우리나라의 백희나 작가가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았어요. 백 작가는 이미 창작그림책 '구름빵'으로 2005년에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그림책 화가'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은 1963년부터 매해 3~4월쯤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문학박람회입니다. 통상 80여 개 나라가 참가해요.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5월로 연기했어요. 그곳에서 출판인들과 동화작가들, 그리고 그림책 화가들이 연결되고, 각종 그림책의 저작권이 거래되기도 해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오는 23일까지 작년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수상한 원화 3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화가들이 어떤 상상을 하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 ▲ ① 키토세 키토세(Chitose Chitose 일본), "연회" 중〈다수결로 정하자〉, 오일 파스텔, 아크릴 과슈, 색연필. ② 산드로 바시(Sandro Bassi, 베네수엘라), "지하철역" 중〈낯선 사람들〉, 종이에 연필. ③ 유케 리(Yuke Li, 중국), "멋진 소풍" 중〈모자를 잃어버린 조니는 생쥐 가족에게 '너희들 빨간 모자 봤니?'하고 물었다〉, 디지털 미디어. ④ 유 지앙(Yu Jiang, 타이완), "탄생" 중〈'난누구지?'하고 고래에게 물었더니 대답 대신 어디선가 아름다운 자장가가 울려 퍼졌다〉, 잉크, 연필, 디지털 미디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작품2는 연필 선으로만 묘사한 그림이에요. 지하철 안에 사람들이 빽빽이 앉거나 서 있는데, 저마다 이상스럽게 생긴 모자를 써서 얼굴을 덮어버렸군요. 다들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무도 주위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않네요. 이곳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러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공간에선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지내는 모양이에요. 각기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자기 우주선하고만 연락을 취하며 사는 모습 같은데, 어쩌면 요즘 우리와 닮았는지도 몰라요.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활용하면 연필과 물감, 색종이나 붓을 사용하지 않고도 비슷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어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기' 기법에도 최신의 기술과 전통적인 방식이 공존하고 있답니다.
작품3은 디지털 그림의 예인데요. 디지털 펜과 붓으로 모니터 위에 그린 후 인쇄한 것이에요. 그림책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친구 여우가 주인공인가 봅니다. 코와 입이 뾰족한 여우가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 수풀을 샅샅이 살펴보던 중, 자그마한 생쥐 가족을 만난 장면이에요. 그림책 화가는 여러 색이 섞인 선들을 사용하여 여우의 털과 주위의 수풀을 개성 넘치게 표현했어요.
그림책에서 선은 화가의 개성을 드러내 주는 핵심 요소예요. 개성은 그 사람만의 '스타일(style)'이라고도 하는데, 스타일의 어원은 라틴어로 '스틸러스(stilus)'로 뾰족한 필기구로 긋는 선을 의미합니다. 날카로운 선, 부드러운 선, 흐릿한 선, 깔끔한 선, 가는 선, 굵직한 선 등 선의 종류는 아주 다양하죠. 선의 느낌에 따라 이야기에 색다른 분위기를 실어줄 수가 있답니다.
작품4는 선과 더불어 색의 효과까지 더해진 그림이에요. 화면 아래쪽에는 가녀린 잉크 선으로 섬세한 묘사를 했고, 이를 모니터로 옮겨 까만 고래를 그려 넣고 바탕색을 채워 작업을 완성했어요. 바다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또 어디서 왔는지 고래에게 물어보지만, 대답 대신 주위에서 잔잔하게 자장가 소리만 울려 퍼집니다. 고래를 나지막하게 수평으로 그려 넣었고, 또 온화한 색이 화면에 가득하기 때문에 아이가 지금 편안한 기분으로 졸린 듯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그림책 그림으로 '잘 그렸다'라고 말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있어요. 독자가 그림 속에 빠져 들어가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어야 좋은 그림책 그림이에요. 아무리 예쁘게 묘사한 그림이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림책 그림으로는 매력이 없다고 할 수 있죠.
미술관에 갈 수 없을 때에는 책꽂이에 오래도록 방치해두었던 그림책을 하나 꺼내 펼쳐보세요. 아이가 태어나 제일 처음 방문하는 미술관이 바로 그림책이랍니다. 번쩍이고 움직이는 이미지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림책을 찬찬히 보며 책장을 넘기는 경험은 또 다른 재미를 줄 수 있습니다. 휙휙 지나가며 잠깐 스치듯 보는 느낌과는 달리, 정지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숨어 있는 문들을 열어볼 기회를 주니까요. 꼭 우리말로 된 그림책일 필요도 없어요. 나라마다 언어가 각각 달라 글은 번역 없이 읽을 수 없을 때가 많지만, 그림은 번역이 없어도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답니다. 그림은 전 세계인들의 공통 언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