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여권으로 세상 읽기] 민주주의 정신 이어갑시다… 아테네 몰락했지만 외침은 살아있죠
입력 : 2020.04.07 03:05
페리클레스의 연설
그리스 여권 표지 안쪽 면에 실려 있는 그림은 '페리클레스의 연설'입니다.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뛰어난 정치 지도자이자 군인이었지요.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긴 얼굴에 나무랄 데 없는 외모' '천둥을 일으키는 웅변술'을 가진 남자였고 과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럼 그림을 볼까요. 멀리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그가 주도해서 완성한 파르테논 신전이 보입니다. 그리고 시민들 가운데엔 투구를 쓴 페리클레스가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31년 겨울에 있었던 이날 연설은 추모 연설이었어요. 그해 아테네가 치른 전쟁에서 전사한 시민들을 추모하는 자리였지요.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기록될 이 전쟁은 그해 막 시작되었고 앞으로 몇 년을 더 갈지 모르는 전쟁이었죠. 그리고 상대는 아테네의 최대 라이벌이자 최강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였습니다. 스파르타가 어떤 국가였는지는 유명하죠. 몸이 약한 사내가 태어나면 벼랑에서 버려졌고 성인 남자들은 언제든 전쟁이나 반란 진압에 투입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군사훈련을 하는 병영 국가였지요. 반면 아테네는 문화생활과 토론을 즐기면서도 무적의 해군력을 갖춘 국가였죠.
그럼 그림을 볼까요. 멀리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그가 주도해서 완성한 파르테논 신전이 보입니다. 그리고 시민들 가운데엔 투구를 쓴 페리클레스가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31년 겨울에 있었던 이날 연설은 추모 연설이었어요. 그해 아테네가 치른 전쟁에서 전사한 시민들을 추모하는 자리였지요.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기록될 이 전쟁은 그해 막 시작되었고 앞으로 몇 년을 더 갈지 모르는 전쟁이었죠. 그리고 상대는 아테네의 최대 라이벌이자 최강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였습니다. 스파르타가 어떤 국가였는지는 유명하죠. 몸이 약한 사내가 태어나면 벼랑에서 버려졌고 성인 남자들은 언제든 전쟁이나 반란 진압에 투입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군사훈련을 하는 병영 국가였지요. 반면 아테네는 문화생활과 토론을 즐기면서도 무적의 해군력을 갖춘 국가였죠.
- ▲ 그리스 여권 표지 안쪽 면에 실린 ‘페리클레스의 연설’ 그림. 페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뛰어난 정치 지도자이자 군인이었습니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페리클레스는 이날 연설에서 이러한 아테네의 특징을 동료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상기시킵니다. 아테네는 소수가 아닌 다수가 통치하는 민주국가라는 점, 아테네에는 자유와 개방성, 시민의 자발성이 살아있다는 점 등을 강조했지요. 그리고 이러한 나라를 위해 전사자들이 목숨을 바친 것은 결코 헛된 희생이 아니며, 살아남은 이들도 그 정신을 이어가자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에 불리하게 전개됩니다. 원래 페리클레스의 스파르타 대응 전략은 '육전 기피, 해전 반격'이었어요. 즉 시민들을 성벽 안으로 철수시켜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와 직접 전투를 피하는 대신 아크로폴리스부터 항구까지 길게 구축해둔 성벽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을 출동시킴으로써 아테네의 막강 해군 함대가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의 본국을 타격하는 전략이었죠. 그러나 여기서 천하의 페리클레스도 예상치 못한 불행이 발생합니다. 그건 역병이었어요. 시민들이 좁은 성 안에 장기간 밀집해 있다 보니 전염병이 창궐했고 페리클레스를 포함한 아테네 시민 3분의 1이 역병으로 죽습니다.
그 후 역병은 잦아들고 아테네는 국력을 회복하는 듯했지만 약 30년을 끄는 전쟁 끝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항복해요. 결국 페리클레스가 자부했던 아테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테네가 남긴 정신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현대 국가들의 헌법 속에, 시민들의 마음속에 민주주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페리클레스를 현재의 그리스 여권이 자랑스럽게 싣고 있는 것도 이를 증명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