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유럽 제패한 거장, 트럼펫 주자였던 제자를 명장으로 키웠죠

입력 : 2020.04.04 03:05

[라트비아 지휘자 얀손스, 넬손스]

아버지 이어 지휘자 된 얀손스, 카라얀·므라빈스키 사사한 후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성장
얀손스의 유일한 제자 넬손스, 29세에 영국 버밍엄 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오르며 '명장' 반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멈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문화예술계의 피해는 그야말로 엄청난데요, 나라 간 왕래가 실질적으로 끊기면서 예정됐던 외국 음악가들의 내한 공연이 거의 모두 취소되었죠. 그중에서 최근 내한이 불발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안드리스 넬손스(42)는 지난해 12월 76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 시대 최고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의 유일한 제자입니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 라트비아가 낳은 두 거장 지휘자에 대해 알아볼까요?

아버지 이어 명지휘자 된 얀손스

마리스 얀손스는 1943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라트비아는 인구가 우리나라 전라남도 인구와 비슷한 188만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로,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죠. 발트해에 접하고 있어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 3국으로 불립니다. 그의 아버지 아르비드 얀손스는 1946년 소련 국내 지휘 경연에서 2등을 차지한 지휘자였고 어머니 이라이다는 소프라노였습니다.

얀손스는 1956년 13세 나이에 러시아로 건너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지휘와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1971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했고, 2년 뒤 아버지를 이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지휘자가 됐어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시 레닌그라드 필을 이끌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에게 지휘 교육을 받았죠. 므라빈스키는 얀손스의 또다른 스승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꼽힙니다. 얀손스는 두 스승만큼이나 완벽주의를 추구했고, 지독한 연습벌레였다고 합니다.

라트비아를 대표하는 두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왼쪽)와 안드리스 넬손스. 본래 트럼펫 주자였던 넬손스는 얀손스가 지휘하던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대타를 맡은 것을 계기로 얀손스에게 지휘를 배워 그를 잇는 명지휘자가 됐습니다.
라트비아를 대표하는 두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왼쪽)와 안드리스 넬손스. 본래 트럼펫 주자였던 넬손스는 얀손스가 지휘하던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대타를 맡은 것을 계기로 얀손스에게 지휘를 배워 그를 잇는 명지휘자가 됐습니다. /소니뮤직·보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 홈페이지

36세에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에 취임한 그는 오케스트라를 유럽 정상급 악단으로 성장시켜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6년 오슬로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지휘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됩니다. 기적적으로 회복하게 됐지만 이후 가슴에 심장박동을 회복하는 장치인 제세동기를 달고 살아야 했어요. 이 때문에 '사선(死線)에서 돌아온 마에스트로(거장)'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이후 2003년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를 맡았고, 2004년 네덜란드의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해 2015년까지 재직했습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명지휘자만 초대한다는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 세 차례나 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얀손스는 한국과도 인연이 많았어요.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와 첫 내한 공연을 가진 뒤, 1996년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0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와 함께 내한했습니다. 또 2012·2014·2016년에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내한했고, 2018년 11월에도 이 악단과 함께 내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동료 지휘자 주빈 메타가 대신 지휘했습니다.

유일한 제자였던 넬손스

다음은 얀손스의 제자 넬손스에 대해 알아볼게요. 두 사람의 인생 궤적엔 닮은 점이 무척 많습니다. 1978년 라트비아 리가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넬손스는 트럼펫과 성악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어요. 라트비아 국립 오페라극장의 트럼펫 주자가 된 넬손스는 24세 때 운명처럼 지휘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라트비아를 방문한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가 배탈이 나는 바람에 급하게 넬손스가 대타로 투입됐어요. 당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얀손스였죠. 공연을 마친 뒤 그는 얀손스에게 "연주료 대신 지휘를 가르쳐달라"고 청했고, 얀손스가 이에 응하며 지휘 교육을 받게 되지요.

지휘자로 전향한 넬손스는 금세 두각을 나타냅니다. 불과 29세에 영국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돼 주변을 놀라게 했어요. 2010년에는 독일에서 열리는 바그너 음악 축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하고 2014년 보스턴 심포니 음악감독, 2018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하며 '젊은 명장'으로 불리고 있어요. 그 역시 스승 얀손스와 마찬가지로 올해 1월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서 지휘를 맡기도 했지요.

하지만 넬손스는 아직 한국 무대에 서지 못했어요. 지난 2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 공연이 예정돼 있으나 코로나 사태로 취소됐습니다. 넬손스 외에도 올해 상반기 예정됐던 야프 판 즈베던, 마르크 민코프스키, 테오도르 쿠렌치스 등 최근 음악계의 중심인 스타 지휘자들의 내한이 줄줄이 무산되면서 아쉬움을 남겼어요. 한국 팬들에게 여러 차례 잊지 못할 시간을 선사한 스승처럼, 제자의 무대 역시 조만간 감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넬손스의 보스턴 심포니 내한 공연, 2월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로 취소]

넬손스가 음악 감독을 맡고 있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39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미국의 명문 교향악단이에요. 1881년 미국 금융업계의 큰손이었던 헨리 리 히긴슨이 사비(私費)를 들여 창단했죠. 미국 동부에 있는 보스턴의 지리적 특성상 초기엔 유럽의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역대 지휘자들은 물론이고, 단원들도 유럽 이민자 출신이 매우 많았죠.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단원들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미국적인 색채를 많이 띠게 됐습니다.

보스턴 심포니는 1960년에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공연 2주 전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일정을 취소했어요. 이번에도 내한이 취소되면서 보스턴 심포니는 세계 정상급 악단 중 유일하게 내한 공연이 없는 단체로 남았습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