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자르고 벗어 던진 치마… 발레리나를 자유롭게 해줬죠

입력 : 2020.04.03 03:01

[튀튀 (tutu)]
18세기 프랑스 발레리나 카마르고
발목까지 덮던 치마 과감히 잘라내며 여성 무용수의 움직임 자유롭게 해

현대 발레는 엄격한 양식에서 벗어나 아예 튀튀 없이 몸선 전부 드러내기도

'발레'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가냘픈 발레리나가 다리가 한껏 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고, 마치 중력을 거스르듯 사뿐사뿐 뛰는 모습이 연상되지요. 발레리나의 스커트를 뜻하는 '튀튀(tutu)'는 발레리나의 우아함을 고조시키기도 하지만, 도약이나 빠른 회전 등 각종 테크닉을 가능케 해 발레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발레의 역사는 치마 길이가 짧아진 기록'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죠.

발레리나를 해방시킨 로맨틱 튀튀

발레는 13세기 이탈리아의 궁중무용에서 시작해 프랑스와 러시아 등 유럽으로 전파됐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 발레는 남성 무용수들의 전유물이었어요. 여성 무용수들도 발레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은 엄격한 사회 분위기에 무대 위에서의 노출이 극도로 제한됐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1714년 여성 무용수들은 발목을 덮는 의상만 입을 수 있다는 칙령까지 내렸어요. 온갖 치장과 함께 길고 무거운 스커트를 입은 여성 무용수들은 1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발레 테크닉을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로맨틱 튀튀와 클래식 튀튀, 그리고 튀튀가 사라진 현대적인 의상을 입은 발레리나의 모습(왼쪽부터).
로맨틱 튀튀와 클래식 튀튀, 그리고 튀튀가 사라진 현대적인 의상을 입은 발레리나의 모습(왼쪽부터). 발레의 발전과 함께 튀튀의 길이는 점점 짧아졌고, 최근엔 아예 튀튀가 없는 의상을 입기도 합니다. 발레리나들의 하체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면서 고난도 테크닉도 제약 없이 펼칠 수 있게 됐어요. /위키피디아·픽사베이
그러다 한 발레리나가 획기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루이 15세 시대의 프랑스 여성 무용수였던 마리 카마르고(1710~1770)입니다. 발레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카마르고는 당시 남성 무용수들의 전유물이었던 고난도 스텝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해요. 이런 능력을 치맛단으로 가리고 싶지 않았던 카마르고는 어느 날 과감하게 스커트를 무릎과 복사뼈 중간쯤으로 싹둑 자르고 무대에 등장해요. 황제의 칙령을 정면으로 어긴 탓에 논란이 됐지만, 그녀의 높은 인기 덕에 곧 짧은 치마는 주류가 되었어요. 이후 이탈리아의 유명 발레리나 마리아 탈리오니(1804~1884)가 1832년 '라 실피드'에서 입은 무릎 아래 길이의 종 모양 튀튀는 '로맨틱 튀튀'로 불리며 낭만주의 발레의 상징이 됐습니다.

고난도 테크닉 가능해진 클래식 튀튀

이후 튀튀의 길이는 점점 더 짧아집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 낭만주의 발레의 인기가 한풀 꺾이고, 엄격한 규칙과 법도를 따르는 고전주의 발레가 러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낭만주의 발레에 비해 고전주의 발레는 훨씬 더 형식화된 방식으로 다채로운 안무를 선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발레의 내용을 초반에 예고하는 서곡(Prelude)과 솔리스트(독무자)들이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다채로운 춤을 많이 보여주는 디베르티스망(Divertissment), 남녀 주역 무용수들의 화려한 발레 기술을 보여주는 그랑 파드되(Grand Pas de Deux) 등의 구성을 갖추게 되죠.

이 영향으로 발레리나의 테크닉과 기교가 더욱 발전하면서 로맨틱 튀튀보다 치마 길이가 짧아진 '클래식 튀튀'가 생겨납니다. 클래식 튀튀는 처음에는 무릎 정도 길이였으나 점점 짧아져 지금은 거의 허리 부근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펼친 우산을 연상시키는 클래식 튀튀는 치마 폭이 넓고 하체가 대부분 드러나기 때문에 테크닉에 제약이 거의 없어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품에서 볼 수 있지요.

현대 발레에선 튀튀가 사라지기도

현대에 이르러 발레리나들은 아예 튀튀를 벗어 던지기도 합니다. 현대 발레가 과거의 엄격한 양식을 버리고 인간의 몸 자체에 집중하면서, 발레리나들의 의상도 한껏 자유로워졌어요. 게오르게 발란친(1904~1983)이나 모리스 베자르(1927~2007) 등 현대 발레를 대표하는 안무가들은 튀튀가 오히려 춤을 보여주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 무용수들에게 수영복과 비슷한 발레 연습복인 '레오타드'와 타이츠만 입혀 춤을 추게 하기도 했죠. 이후 레오타드는 현대 발레를 대표하는 의상이 되었습니다.

최근 현대 발레 작품에서는 이처럼 장식을 배제한 옷이나 일상복을 입고, 맨발로 춤을 추는 등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용수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튀튀가 사라진 이후의 발레는 또 어떤 흥미로운 변화를 이룰지 기대됩니다.


[루이 14세 별명 '태양왕'인 까닭… 발레 무대서 태양 역 맡아서래요]

프랑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는 역사상 최초의 '스타 발레리노'로 부를 만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연마한 그는 열세 살이었던 1651년 '카산드라의 발레'에서 무용수로 데뷔했고, 1670년까지 총 27편의 발레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태양왕'이라는 그의 별명도 발레에서 비롯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 '밤의 발레'에서 태양 역을 맡았는데, 온몸에 황금빛을 덮어쓰고 우아한 춤을 선보여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계기라고 합니다. 무대에서 은퇴한 뒤에도 루이 14세는 세계 최초의 발레 아카데미인 '왕립 무용 학교'를 설립하는 등 발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왕립 무용 학교는 현재 프랑스의 국립 발레단인 파리오페라발레단으로 이어지지요.


양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