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뇌제'로 불린 러시아 최초의 차르… 아내 잃고 폭군으로 돌변
입력 : 2020.04.01 03:08
[이반 4세]
1547년 17세에 러시아 '차르' 올라…
국가 통제 강화하고 귀족 세력 약화, 영토 침탈하던 타타르족까지 정복
첫 번째 아내 아나스타샤 죽음 이후 점차 폭력적 성향 조절하지 못해
반대세력 인정사정 없이 숙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차르는 앉아서 위로부터 감시하며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는 거울이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나는 매일 일하며, 군림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러한 말이 나온 이유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2000년 이후 모두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차르'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 모습은 차르로서 처음 왕관을 썼던 이반 4세(1530~1584)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어요.
◇귀족들에게 홀대받은 어린 대공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였던 옐레나 글린스카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공 자리를 이을 적장자를 원했던 바실리 3세는 늦은 나이에 아들 이반을 보고 기뻐했어요. 하지만 이반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이반은 1533년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반 4세에게 '대공'은 이름뿐인 직위였어요. 당시 러시아는 귀족 가문인 슈이스키가와 벨스키가로 양분돼 끊임없는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실 행사가 아닐 땐 이반 4세를 홀대하였어요.
이러한 무질서와 핍박을 경험한 이반 4세는 귀족들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이 불신하게 되었어요. 기록에 따르면 이반 4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놀이가 높은 테라스에서 개를 떨어뜨리고 개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일이었다고 하니 그의 성격이 얼마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형성됐는지 알 수 있어요.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해 개혁 실시
1547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반 4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차르'로 즉위합니다. 로마제국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는 러시아 최초의 차르입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비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차르로 칭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지위였죠.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러시아 차르국을 선포합니다.
◇귀족들에게 홀대받은 어린 대공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였던 옐레나 글린스카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공 자리를 이을 적장자를 원했던 바실리 3세는 늦은 나이에 아들 이반을 보고 기뻐했어요. 하지만 이반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이반은 1533년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반 4세에게 '대공'은 이름뿐인 직위였어요. 당시 러시아는 귀족 가문인 슈이스키가와 벨스키가로 양분돼 끊임없는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실 행사가 아닐 땐 이반 4세를 홀대하였어요.
이러한 무질서와 핍박을 경험한 이반 4세는 귀족들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이 불신하게 되었어요. 기록에 따르면 이반 4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놀이가 높은 테라스에서 개를 떨어뜨리고 개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일이었다고 하니 그의 성격이 얼마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형성됐는지 알 수 있어요.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해 개혁 실시
1547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반 4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차르'로 즉위합니다. 로마제국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는 러시아 최초의 차르입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비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차르로 칭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지위였죠.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러시아 차르국을 선포합니다.
- ▲ 이반 4세의 초상화(왼쪽)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나스타샤의 동상. 17세에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한 그는 초기엔 대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며 건설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죽음 이후 잔혹한 공포 정치를 펼치며 국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결국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이어졌습니다. /위키피디아
특히 그의 인기가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타타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덕분이었어요. 타타르족은 이전부터 러시아 도시들을 침탈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기도 했어요. 1552년 이반 4세의 군대는 여러 차례의 사투 끝에 카잔한국(汗國)을 정복했고, 4년 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汗國)도 장악하면서 또 하나의 타타르족 근거지를 무력화해나갔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볼가강 전 유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시베리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됐어요. 이반 4세를 흔히 '뇌제('그로즈니'라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말로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섬뜩하고 무섭다는 의미)'라고도 부르는데, 훗날 펼친 공포정치 탓도 있지만 이처럼 강력한 정복 정책을 펼친 것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내 죽음 이후 공포정치 시작
하지만 이반 4세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폭력적인 기질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줬던 그의 아내 아나스타샤가 1560년 30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그의 변화가 시작됐어요. 그는 귀족들이 왕비를 독살했다고 믿었고, 그녀의 죽음 이후 이반 4세는 대귀족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어요.
우선 이반 4세는 전 국토를 차르의 직영지인 '오프리치니나'와 귀족들의 영지인 '젬시치나'로 구분하고 오프리치니나에 편입된 토지를 자신의 오프리치니크에게 나눠주었어요. 오프리치니크는 '지옥의 암흑'이라 불리는 자들로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대 조직이었어요.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타고 빗자루와 개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서 온 나라를 누비며 대규모 테러를 자행하였어요. 대상은 차르에게 배반을 꾀한 자뿐만 아니라 차르의 기분을 상하게 한 자도 포함되었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였어요.
공포정치로 이반 4세는 막강한 전제 권력을 확립할 수 있었지만, 나라는 점점 기울어갔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을 틈타 1571년 타타르족이 수도 모스크바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고 10만여 명의 시민이 학살됐어요. 이반 4세는 말년으로 갈수록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자신의 아들마저 죽였고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