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고전이야기] 류성룡이 기록한 임진왜란… 왕의 허물도 가감없이 지적했죠
징비록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어떠한 어려움도 피하지 않는 것이 도리요. 끓는 물 속이라도 들어가야 할 때에 이 정도 일을 피하려 한단 말인가?"
'임진왜란' 하면 보통은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지만, 수많은 사람의 의지와 분투가 모여 극복한 전쟁이에요. 이름 모를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나라를 지켰는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어요. 정치하는 사람 중에 자기 한 몸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 국난을 극복하려는 사람 또한 여럿이었어요.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맡았던 류성룡(1542~1607)이 대표적인 인물이에요. 그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그 기록을 모아 훗날 펴낸 책이 바로 '징비록'이에요. '징비록'은 책으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의미인 셈이죠. '징비(懲毖)'는 유교 경전인 '시경'에 나오는 말로 '이전을 반성하고 삼가다'라는 뜻이에요.
- ▲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지은 임진왜란 전란사로, ‘징비’는 과거를 반성하고 삼간다는 뜻입니다. /위키피디아
'징비록'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전쟁과 연관된 나라, 즉 조선과 일본은 물론 중국의 정세를 정확하게 기록한 대목입니다. 일본이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을 침략해야만 했던 이유, 임진왜란 전후로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국의 주인이 바뀐 상황 등을 류성룡은 소신 있게 서술하고 있어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왕의 실정(失政)과 허물을 가감 없이 지적하고, 그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을 안타깝게 바라본다는 사실이에요. 류성룡은 한양에 이어 평양성을 버리려는 임금의 행적을 자세하게 묘사해요. 선조는 직접 나서지도 못하고 세자를 내세워 "평양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을 평양성 대동관 문 앞에서 전하게 해요. 하지만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고, 마지못해 선조는 백성 앞에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평양성을 버릴 마음을 알아차린 백성은 "너희가 평소에는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마저 속이는구나"라며 목소리를 높여요. 그만큼 백성의 고초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류성룡은 피폐한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조세제도를 바꾸고 노비가 양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해요. 하지만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혀 제대로 실행되지는 못했어요. 그럼에도 류성룡은 위로는 권세가들을 비판하는 일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살림을 살피는 일까지 두루 마음을 쓰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탰어요.
'징비록'이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해, 나라를 운영하는 실제적인 방안까지 두루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일을 통해 우리가 사는 현재와, 곧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징비록'은 역사를 배우는 첫 자리에 있어도 좋을 책입니다.